신명나는 사회를 만들어가자(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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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93년은 실로 32년만에 다시 문민시대를 연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32년이면 한세대를 넘는 긴 세월이다. 그동안 우리는 대장출신 집권자에 익숙해졌고 다양성과 토론보다는 획일성과 효율에 더 가치를 둔 시대를 살았다.
6공의 지난 5년간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진통의 과도기였다. 억눌렸던 욕구가 분출되면서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때 승천하는 용으로 칭송되던 우리 경제는 경쟁력을 잃고 고전중이며,열대의 밀림과 열사의 사막,그리고 격랑의 오대양을 마다않고 뛰었던 우리의 일욕심은 어느새 3D(어렵고 위험하고 더럽고) 기피로 둔갑했다.
○맥빠질 일 없어져야
문민시대가 회복된다고 해서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과 문제점이 일거에 해소될리는 없다. 다만 새로운 지도자가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느냐에 따라 큰 전환의 계기가 마련될 수는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가 새로운 전환의 해를 맞아 올해의 주제를 「신명나는 사회」로 정한 것도 그런 계기를 살려보자는 뜻에서다. 그저 막연히 새 시대를 맞아 신명을 내보자는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가 신명이 날 수 있겠는가를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신명이 나자면 우선 맥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부패구조·투기구조·인플레 구조에서 일반 국민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데 신명을 낼 도리가 있겠는가.
때문에 우선 뿌리깊은 부패구조를 허무는 일이 가장 우선이다. 부패는 코스트를 늘리고 생산성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들의 의욕을 잃게 한다.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강도의 일을 하는데 부패구조 때문에 누가 별안간 씀씀이가 좋아지고 재산이 불어난다고 하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맥이 빠져 일할 맛이 가시고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부패구조 청산부터
투기나 인플레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일하면서 근검 절약해 몇년 계획으로 집한칸 마련하려고 저축을 하고 있는 보통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지난 88∼90년처럼 일시에 집값·땅값이 두세배로 뛰게 되면 제 집을 가져보겠다는 희망은 멀어지고 스스로가 얼마나 초라해 보이겠는가. 더구나 주변에서 땅투기다,아파트투기다 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을때 열심히 일해 한푼 두푼 저축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지겠는가.
일할 맛이 안나기는 투기로 떼돈을 번 사람도 마찬가지다. 쉽게 큰 돈을 버는 길이 있는데 왜 애써 일하고 절약해 작은 돈을 모으려 하겠는가.
○일한만큼 보람찾게
문민시대가 열리는 새해에는 우선 이렇게 국민들을 맥빠지게 하는 부패·투기·인플레 구조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뿌리깊은 부조리의 구조가 한순간에 고쳐질 리는 만무하다. 한때의 캠페인으로서가 아니라 투철한 문제의식을 갖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래도 사회가 견딜 정도로 억제할 수 있을까 말까한 어려운 과업이다.
신명이 나자면 맥빠지는 일을 없애는 것만큼 적극적으로 살 맛,일할 맛이 나도록 하는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일한만큼 보답이 돌아와야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바로 정의사회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생산성을 높여도 일한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의욕이 지속될 수 없다. 내가 열심히 일해 조직이 잘되고,회사가 잘되고,나라가 잘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자부심이 자기 이익과 연결되지 않을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조직과 회사와 나라가 잘 될뿐 아니라 나 또한 잘될때라야 일할 맛이 나고 신명이 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산업화과정에서 야기된 지역간·산업간·부문간의 불균형 성장과 빈부 격차로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겪었다. 신명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선 균형성장과 분배의 정의란 과제에 우리 사회가 보다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음으로는 모든 부문에서 경쟁과 창의가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 우리 국민들은 묘한 평등의식을 지니고 있다. 평등의식은 좋은 것이지만 정도를 넘어 집단의식과 연결되면 경쟁과 창의를 저해하는 질곡이 되기도 한다. 동기생이니 비슷한 처우를 받아야 하고,후배니까 진급도 늦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경쟁을 위축시키고 평준화에 안주하는 분위기를 낳는다. 안주는 침체를 가져올 뿐이다.
○경쟁·창조적 기풍을
그러한 안이한 안주의식을 깨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정신,경쟁과 창의가 마음껏 발휘되는 사회기풍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다행히 문민시대를 이끌 김영삼당선자는 부패추방문제를 비롯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점과 변화의 방향에 대해 상당한 인식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신명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정부가 아니다. 각 부문에서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개인과 소조직의 리더들이다. 정부는 그런 사람들이 자유롭게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북돋우고,맥이 빠지지 않을 분위기를 만들어만 주면 된다. 이것이 정부의 몫이다. 신명이 나면 말 안해도 우리 국민은 다시 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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