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민원에 지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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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이 과도한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 "어떻게 대기업이 이럴수 있느냐"는 한마디로 전후사정 가릴 것 없이 '악덕기업' 또는 '대기업의 횡포'로 몰아붙이는 풍토, 대기업을 물고 늘어지면 이슈를 만들 수 있고 떡고물을 챙기기 쉽다는 부정적인 접근방식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달 중순 FnC코오롱 대표이사실에 한 소비자가 찾아왔다. 단종모델에 대한 애프터 서비스를 요구하며 '업무 방해' 수준의 시위를 했고, 결국 이 소비자는 교통비와 피해보상금을 챙겨 받고서야 돌아갔다.

회사 관계자는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민원이 흔하다"며 "예전에는 단순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했으나 요즘은 인터넷과 언론에 불만 사례를 올리겠다고 반 협박을 하는 소비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민원 자체가 터무니 없는 경우도 있다. 최근 삼성전자 앞에서 벤츠 승용차를 세워두고 휴대폰 불량을 항의했던 김모씨. 김 씨는 "이건희 회장이 직접 나와 사과를 하고, 불량품을 만들지 말라"고 요구했다. 김 씨는 이에 앞서 SK텔레콤에도 민원을 제기하다 SKT본사 정문을 자동차로 들이받기도 했다. 삼성전자와 SK텔레콤 측은 김씨가 글로벌 로밍 서비스 등록을 하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해명했다. 불량 문제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얘기다.

외국계 완성차 회사인 A사 마케팅 담당자는 지난해 말 50대 여성고객으로부터 보름여 동안 항의성 전화에 시달렸다. 영업소 전단지에 적혀 있는 '재고차량 할인판매'란 문구 때문이다.

30대 한정으로 재고차량을 싸게 판다고 홍보했는데 뒤늦게 이를 본 고객이 막무가내로 재고차량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재고물량이 더 없다고 설명을 해도 "대기업이 고객을 기만했으니 신차를 재고차량 가격에 내놓지 않으면 인터넷에 항의성 글을 올리겠다"고 협박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한 동안 일손을 잡지 못할 정도로 시달렸다고 한다.

최근 소비자를 생각하는 시민들의 모임은 삼성전자가 만든 PDP TV 4개 모델에 대해 공개 리콜을 요구했다. 소시모는 2005~2006년에 생산된 패널을 활용한 PDP TV 4개 모델 일부제품에서서 화면 절반이 검게 나타나는 불량 현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는 다른 제품과 비슷한 수준의 불량률이고, 소비자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며 리콜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대기업의 애프터서비스에 대한 기대치가 아무리 높아도 '리콜'을 요구하는 건 과하다는 게 삼성측 입장이다.

협력·하청업체의 도를 넘어선 민원도 적지 않다. 하이닉스에서 아웃소싱으로 청소 등 용역업무를 하던 인화, 성훈, 에프엠텍 등 하청업체 직원들이 소속 회사는 제쳐두고 하이닉스를 걸고 넘어진 사례도 '명망높은 대기업'이기 때문에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사례로 꼽힌다.

2004년 12월 하이닉스는 하청업체 직원들이 잦은 파업 등으로 업무에 차질을 빚자 해당 업체들과 거래를 끊었다. 이 업체들은 곧바로 직장을 폐쇄했다. 일자리를 잃게 된 노조원들은 2005년 초부터 하이닉스를 찾아 복직을 요구하며 3년여가 넘게 하이닉스를 괴롭혔다. 이들은 지난해 5월 하이닉스 본사 사장실을 점거하는가 하면 올해초 실적발표회장에 집단 난입하기도 했다.

최근 삼성SDI는 협력업체 직원들의 항의방문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들은 삼성본관 앞에서 "구조조정을 철회하고 고용보장을 하라"며 피켓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삼성SDI에 부품을 납품하던 하청업체 직원들이 일감이 줄면서 해고됐고, 결국 삼성SDI를 상대로 실력 행사에 나선 것이다. 삼성SDI에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럴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소비자보호원 김기범 팀장은 "수년동안 사용한 제품을 무상수리를 하라거나 새제품으로 교환해달라는 민원등 소비자의 과도한 요구가 종종 제기되고 있다"며 "기업과 소비자 모두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 이승철 전무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은 해야 겠지만 대기업이라고 해서 지나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라며 "시장경제 원리에 벗어나는 요구는 단기적으로 이해당사자에게 득이 될 지 몰라도 결국 그 피해가 국민 전체에 돌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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