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빵점 남편·빵점 아빠 야구 감독들의 몸부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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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감격의 순간에 김재박 현대 감독 곁에는 정진호 수석코치가 있었다. 삿포로에서의 허탈한 좌절의 순간에도 김재박 대표팀 감독 곁에는 정진호.김성한.조범현 등 대표팀 유니폼을 함께 입었던 코치들이 있었다.

김재박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이 결정된 뒤 한시간이 넘은 후에야 "이제 집사람 생각이 난다. 전화라도 해주고 싶다"며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프로야구 감독은 빵점 남편, 빵점 아빠다. 1월 중순이면 전지훈련이랍시고 해외로 떠나 두달 넘게 집을 비운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설날도 이국 땅에서 맞는다. 전지훈련이 끝나고 돌아오면 시범경기, 정규시즌이 이어진다. 약 일곱달 동안이다. 이때는 그래도 절반은 집에서 잔다. 집에서 잔다고 정상적인(?) 가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기를 끝내고 귀가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가족과 대화할 시간 자체가 원천봉쇄된다. 어쩌다 주말에 식사라도 한 번 하면서 잃어버린 점수를 만회하려고 하지만 그럴 때면 공통된 화제가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더 외톨이가 된다고 한다.

시즌이 끝나면 마무리 훈련(11월)이 기다리고 있고, 12월에는 각종 시상식과 송년회 등 공식 행사가 줄을 잇는다. 곁에서 사람이 떠날 날이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외롭다. 만나면 야구인이고, 입을 떼면 야구 얘기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가족과 해보는 게 어떤 행복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이 승부사들이 애써 짬을 내는 게 연말연초다. 두산 김경문 신임 감독은 지난 15일부터 약 2주간 미국에 다녀왔다. 그곳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다. 초보 감독으로 발을 떼는 그에게 가족과 함께 재충전할 시간이 '인간적으로' 필요했다고 한다. 기아 김성한 감독은 지난 20일부터 5일간 가족 동반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롯데 양상문 감독도 31일부터 4일간 괌으로 가족 동반 여행을 떠난다. 한화 유승안 감독은 30일부터 2박3일간 제주도로 떠난다. LG 이순철 감독도 동해안 여행을 구상 중이다.

프로야구 감독. 그들은 머리가 차가워야 하는 승부사다. 그러나 그들 역시 승부사이기 이전에 남편이고, 아버지다. 한 해를 돌아보고, 내년을 구상하는 시간에 가족과 함께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차가운 머리에 따뜻한 가슴'으로 내년 프로야구의 장을 활짝 열기를 바란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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