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조직 심어 차기 준비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그런데 휴가 사흘만에 최대통령의 비서실장이 흰 봉투를 하나 갖고 서울에 왔는데 뜯어보니 하야 성명 문안이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전 장군은 그즈음 외신과의 인터뷰(8월8일 뉴욕타임스)에서 한국에서의 지도자는 야망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천명이 닿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워낙 이미지가 나빴던 탓인지 이 말도 마치 대통령 운을 타고 난 것처럼 자랑하는 분위기로 보도됐고, 그런 여론에 대해서도 전씨는 불평을 했습니다』

<"부하 쓸 줄 아는 분">
이 증언대로라면 전두환 장군을 적극적으로 옹립하고자 판을 까고 부추기던 강경세력이 따로 있었다는 내용이 된다 이른바 「킹 메이커」로, 양 허씨는 그 핵심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적지 않은 이들이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감안해야 할 것은 정상적이지 못한 일을 벌인 사람들은 나중에 흔히 자신의 행위를「어쩔 수 없이 떼밀려갔다」는 식의 수동태로 표현하기 일쑤라는 점인 것 같다. L씨는 그 점에 대해『전 대통령의 담백한 성격에 비추어 볼 때 나에게 거짓말한 것은 아니었다고 믿는다』며 『어떻든 그가 12·12당시부터 집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 낱낱이 규명되는 일이겠지만 당사자인 최규하·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은 지금도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3허와 이학봉씨 개인에 대한 평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5공화국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한 인사는 『허화평은 대단히 지적이고, 이학봉은 넉넉하며, 허문도는 로맨티스트』라고 평했다 허삼수씨에 대해 다른 이는『충섬심과 맡은 일에 대한 집중력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청와대에서 두 사람을 가까이 대해보고 나서 12·12사태 때 허화평씨가 일종의 「기획」을, 허삼수씨가 「물리력 행사(정 참모총장 연행)」를 담당한 까닭을 알게 됐고 전 대통령이 부하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분이구나 하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허문도씨에 대해 한마디로 말해 패너틱( FANATlC=열광적인) 한 사람』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양 허씨의 청와대시절 함께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한 인사의 증언. 『82년까지 허화평·허삼수 두사람은 정말 대단했어요』우리 일반 비서관들의 눈에「보좌관」허화평씨는 사실상 비서실장 수업을 쌓고 있는 것으로 비쳤어요 .말이 차관굽이지 장관이 그 방에 불려가 혼나는 때도 있었습니다.

<대통령 총애 식어>
그래서 허 보좌관이 정무수석으로 발령 받고 본관을 떠났을 때는「대통령의 총애가 다소 식었나보다」고 짐작하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허화평씨가 과묵한데 비해 허삼수 수석은 할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성품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이제부터는 각하는 문제가 아니다 7년 뒤에 어떻게 각하의 뒤를 이어받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다. 부단히 개혁, 전국 방방곡곡에 우리 조직을 심어 그때에 대비하자」는 식의 호언장담도 하곤 했어요. 전체적으로 종합해 보면 양 허씨는 개혁을 외치면서도 그 가운데 「차기」를 염두에 두는 듯한 징조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뭐랄까… 5공이 안정기에 점차 들어서고 있는데「허씨들은 창업하던 당시의 기상 속에서 행동하는 느낌이 강했어요. 마상에서 전하통일은 할 수 있지만 다스리는 일은 할 수 없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수성단계는 창업 때와는 엄연히 다르고, 통치자 입장에서는 부리고 싶은 사람도 단계마다 차이가나는 법이지요』
이 인사는『82년말 양 허씨가 불러난 데는 친인척비리 문제에 대한 강경한 건의도 작용했지만 전체적으로 권력의 논리 때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여러 관련자들은 또 5공권력에 양 허씨가 등장했다 하루아침에 퇴장하는 드라마에서「천재」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경제관료였던 김재익 경제수석(83년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작고)이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양 허씨와 김 경제수석은 비슷한 시기에 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했고, 결과적으로 물러난 쪽은 양 허씨였다 그러나 남아 있던 김 수석은 아웅산까지 대통령을 수행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지난여름에 아이들이 방학을 맞아 미국에서 귀국했길래 함께 연희동(전두환씨 자택) 으로 인사를 갔어요. 전 전 대통령 내외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얼마 전 택시기사한테 들은 우스갯소리가 기억나 말씀을 드렸지요.「요새경제가 어렵다 하는데 차라리 전두환씨를 기획원 장관으로 임명하자. 대통령이야 단임이니 다시 안 된다지만 장관은 가능한 것 아니냐. 5공이 다른 건 몰라도 물가는 잡지 않았느냐」던 그 택시기사의 말을 전하니까 전전대통령이 크게 웃으면서 「에이, 김재익이가 살아 있어 비서실장이라도 해주면 몰라도 나 혼자 되겠어요」 하시더군요. 무척 고맙게 느꼈습니다(고 김 수석의 부인 이정자씨)』

<「경제천재」의 등장>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이 같은 평가가 공치사는 아니었다고 보아야할 것 같다. 특히 5공이 출범한 상황에서 그러했다. 80년9월 청와대에 들어온 김재익 수석은 자신의 소신과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점차 허씨들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수석은 권력 자체에 대한 욕심은 아예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특이체질」의 사나이였다는 것이 일치된 증언이기도 하다. <노재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