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의 근원적 맥 검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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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국 회화의 현대성 확보 가능성을 타진해보는「92현대 한국회화, 선묘와 표현전」이 내달7일까지 호암 갤러리에서 열린다.
「우리 고유한 조형언어의 추구」를 목표로 88년부터 매년 개최해 왔는데 이번으로 5회째를 맞는다. 4회까지는 우리 미술의 현 위치를 점검하고 국제적 보편성의 획득 가능성을 살피는 한편 새로운 한국정신을 모색해 보았다.
이번에는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우리의 근원적인 예술충동과 원형적 감각을 검증하기 위해 주제를「선묘와 표현」으로 결정했다.
김기창·김춘수·김태호·김호득·문봉선·박서보·박승규·박영하·백순실·사석원·석난희·석철주·송수남·심현희·오수환·유재구·유휴열·윤명노·이강소·이일종·이지선·이철량·이희중·정탁영·한명호·한영섭 허진 등 27명의 작가가 59점을 선보인다.
초대받은 27명의 작가들이 오늘의 한국미술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의 한국미술 속에 잠재되어 있는 우리 고유한 미의식과 방법을 검출해 내는데 가장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선정된 작가들의 연령층도 80대 초반에서 20대 후반까지 폭이 매우 넓다.
주제가 뚜렷한 전시회일 뿐만 아니라 기성의 유명작가와 이제 막 등단한 신인이 같은자리에 초대를 받아 우리 화단에 도사리고 있는 권위주의를 불식한다는 점에서도 신선함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국내 화단은 한국회화를 지역적인 회화양식으로 좁게 생각하고 오직 서구 미술의 수용을 통해서만 현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오해해 왔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우리 미술계에는 서구 미술의 단순한 차용에서 벗어나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조 민화 등에 맥맥이 흐르는 우리의 조형정신을 기초로 자주적인 특수성을 회복할 때 현대성은 물론 국제적 보편성까지 획득할 수 있다는 반성이 폭넓게 일어나고 있다.
이번 전시회의 커미셔너인 평론가 오광수씨는 페인팅으로 상징되는 서구 회화와는 달리 동양 회화의 특징은 드로잉에 있으며, 따라서 동양회화는 선의 회화로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동양의 회화를 선의 회화로 관념 짓는데는 지·필·묵 등 매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지·필·묵은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를 쓰는데도 사용된다. 한국·중국·일본 등 동양의 몇몇 민족에게는 그림을 그릴 때 서체적 충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게 큰 특징이다.
이 같은 점에 주목한 오씨는 모필에 의해 유도되는 드로잉을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예술충동의 고유한 표현방법으로 규정하고 드로잉적 충동을 다시 서체적 충동, 선추의 구성, 번지기(선염)등 표면의 구조로 나눈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를「선묘와 표현」으로 결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에는 이 세부분에서 남다른 성과를 보이는 작가들이 초대를 받았다.
서체적 충동을 검증할 수 있는 작가에는 김기창·석난희·이강소·윤명로·김호득·박승규· 한명호·사석원·오수환·문봉선·김춘수·이철량·유휴열·이지선·석철주씨 등이 들어있다.
반면 선묘의 구성적 측면에서는 박서보·심현희·백순실·허진·이희중·송수남씨 등이 검증의 대상으로 선정됐고, 표면구조를 검증할 수 있는 작가로는 유재구·정탁영·이왈종·한영섭씨 등이 선택됐다.
이 전시회를 위해 커미셔너인 오씨는 2개월에 걸쳐 27명 작가의 작업실을 일일이 방문, 주제에 맞는 작품을 엄선했다. <최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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