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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유해발굴 남·북·미·중이 함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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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오늘은 6·25 전쟁 57주년이 되는 날이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30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중단됐다. 한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전쟁의 상흔도 잊게 했다. 월간중앙이 최근 서울시내 7개 초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상당수의 학생이 6·25 전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37.8%의 학생이 ‘조선시대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알고 있었다. 5명 중 1명은 ‘일본과 우리나라가 싸운 전쟁’이라고 응답할 정도였다. 너무도 빨리 6·25 전쟁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러나 전사자의 유족들에겐 결코 잊혀진 전쟁이 아니다. 유해를 찾지 못해 한을 품고 사는 유족들에겐 더욱 그렇다.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6·25 전쟁 전사자는 13만여 명이나 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시신은 구천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유해를 찾지 못한 유족들이 여전히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6·25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방부 유해발굴사업단은 요즘 의미 있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6·25 전사자의 유해 매장 추정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해 매장지도’를 제작하고 있다. 7월에 발간될 이 지도에는 비무장지대(DMZ)에 최소한 1만 구 이상의 국군 유해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DMZ는 정전협정의 산물이다.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해 155마일 군사분계선(MDL)을 따라 남북 2km에 걸쳐 DMZ을 만들었다.
 
협상을 시작해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2년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협상 기간에 한 치라도 더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 DMZ 곳곳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시신이 산을 이뤘다. 경기도 연천군의 ‘백마고지’와 DMZ에 들어가 있는 ‘피의 능선’에선 6만 명 정도가 전사했다. DMZ 내의 일부 야산은 양측의 수많은 포격 끝에 산 정상이 1m쯤 깎였다고 한다. 낮과 밤의 주인이 바뀐 고지도 허다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양측 모두 DMZ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미수습 유해가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DMZ에는 한국군 유해 외에도 북한군과 미군, 중국군의 유해 수만 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해발굴사업 관계자는 “DMZ에 미군의 경우 2000여 구, 중국과 북한군의 유해도 최소한 수만 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북한에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6·25 전쟁 당사국으로 DMZ에 유해가 있는 남·북·미·중이 공동으로 유해발굴 사업을 하자”는 것이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6·25 종전 선언 구상을 밝힌 뒤 한반도 평화협정 논의가 모색되고 있다.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모멘텀으로 DMZ 공동 유해발굴을 시작했으면 한다.
 
이미 1996년부터 북한 지역에서 유해발굴 작업을 한 미국은 DMZ 공동 유해발굴에 적극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도 비공식 루트를 통해 긍정적 입장임을 내비쳤다. 남한 정부도 기대하고 있다.

다만 북한의 태도가 변수다. 북한만 결심하면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는 역사적 사업이다. 북한이 DMZ 공동 유해발굴 사업에 나설 경우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호전될 수 있다. 남북 대치의 상징물인 DMZ을 평화벨트(Peace Belt)로 바꾸려는 실천적 의지를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결심은 빠를수록 좋다. 매장 장소를 확인해 줄 전사자의 전우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단을 기대해 본다.

이철희 정치부문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