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53. KPGA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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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필자가 KPGA 회장 때 한 대회에서 시타를 하고 있다.

나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제6대 회장을 맡았었다. 초대 허정구 회장에 이어 연덕춘(2대)·박명출(3, 4대)·김복만(5대) 회장이 뒤를 이었다. 1983년 취임 당시 내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사실 나는 선수로 더 뛰고 싶었다. 50세까지는 대회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복만 회장의 임기가 끝나니 주위에서 내게 회장으로 나서라고 했다. 후배인 이일안 프로가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후배가 먼저 회장을 하게 되면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후보해 선거를 치렀다.

 5대까지는 지명 또는 추천으로 회장을 뽑았는데 6대에는 두 명의 후보가 나서 KPGA 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치르게 됐다. 나와 이 프로는 워커힐호텔에서 선거 공약을 내걸고 대의원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당시 골프계에는 연습장을 연고지로 삼은 속칭 ‘워커힐사단’과 ‘반포사단’ 양대 계파가 있었다.

 워커힐은 김승학이 , 뉴코리아골프장의 연습장 출신들이 만든 반포는 손흥수가 리더였다. 김승학과 손흥수가 모두 내 손을 들어준 덕분에 꽤 많은 표 차이로 당선됐다. 난생 처음 치러본 선거는 정말 힘들었다. 차라리 공을 치는 것이 훨씬 쉬웠다. 이일안 프로는 내 뒤를 이어 7대 회장을 지냈다.

 회장 취임 뒤 KPGA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창립 때 3000만원이었던 협회 자산은 15년이 지났는데도 4100만원에 불과했다. 물가 상승률을 반영하면 오히려 줄어든 셈이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심했다.

 후진 양성을 위해서는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판단, 자산 늘리기에 힘쓰기로 했다. 그래서 나와 회원들은 재일동포의 힘을 빌리자는데 뜻을 모았다. 나는 그때까지 일본에 자주 다녔고, 재력있는 동포를 많이 알고 있었다.

 도쿄에서부터 요코하마·나고야·오사카·시모노세키·규슈 등 일본 6대 도시를 다니며 동포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었다. 한국골프를 도와 달라는 호소에 2500만원의 기금이 모였다. 협회 자산이 7000만원 정도로 불어나 대회를 더 창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만든 대회가 팬텀오픈이다. 최초로 국산 골프공을 만든 동성화학의 백제갑 회장(작고)을 만나 대회 후원을 권유했다.
 팬텀오픈에서는 반드시 팬텀 공을 사용하도록 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 효과가 있었다. 백 회장은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한 번씩, 1년에 두 차례 대회를 열었고, 일간스포츠오픈까지 창설했다. 이에 따라 KPGA는 85년부터 매년10개 대회를 개최했다.

 나는 KPGA 회장 시절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한다. 그때 나는 재테크에는 별 관심이 없어 개인 돈을 써가면서 협회 발전을 위해 뛰었다. 그러나 회장을 하느라 선수 생활을 더 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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