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가족을 부탁하네”(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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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한국기체공업 대표 구천수씨(50)의 빈소가 마련된 중앙대 용산병원 영안실.
고려대 경영학과 62학번 동기생 모임인 「호록회」회원 20여명은 9일 밤 구씨의 영정 앞에서 동기회장 엄종대씨(51·국민은행 마포지점장)가 가져온 고인의 편지를 읽고 또 한번 눈물을 떨구어야 했다.
노트 두장에 쓴 편지는 구씨가 자살 직전 남산공원 벤치에 앉아 쓴듯 이미 눈물이 곳곳에 번져있었다.
『삶을 마감하면서 가장 걸리는 것은 사채업자들의 등쌀에 집도 절도 없이 이리저리 밀려 다닐 가족들이라네. 친구들,내가 살아있었을 때의 정분을 생각해 아이들이 자립할 때까지 가족들의 생계를 돌봐주기 바라네. 그 고마운 마음은 영혼이 돼서라도 잊지 않겠네.』
구씨의 편지에는 그동안 사업에 쫓겨 제대로 돌보지 못한 자식들,이웃에서 돈을 빌려오도록 시킨 아내 등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절절이 나타나 있었다.
부도가 난뒤 구씨 가족들에게 맨처음 닥친 일은 여기저기서 끌어들인 빚담보로 저당잡힌 80여평의 집과 부동산에 대한 압류. 사채업자의 빚독촉을 피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구씨는 성당 교우의 집에,부인은 중3 막내아들과 함께 친구집에,큰딸은 학교기숙사에,고2 장남은 친척집에 몸을 숨겨야했다.
『뒤늦게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조문을 오고 중소기업 부양책을 논의한다고 법석을 떨지만 이제 무슨 소용입니까. 이 추운 겨울 밖으로 내몰린 가족들은 어떡합니까.』
편지를 읽던 한 친구는 올해 중소기업 대상을 수상하고도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정책의 허점 때문에 죽음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었던 구씨의 마음고생을 생각하며 울먹이듯 항변했다.
이날 빈소에 모인 동기생들은 우선 구씨의 유족들이 당장 거처할 방이라도 얻을 수 있게 전세값이라도 모으고 앞으로 기금을 모아 돕기로 했다.<이현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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