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여론(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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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권위주의 시절의 「카더라」 방송이 재현되고 있다. 「어느 여론조사기관에서 후보지지율을 조사했더니 어느 후보가 뜻밖에도 1등이라더라」 「정확도로 이름난 모그룹 비서실의 조사에 따르면 후보지지율이 이러 이러 하더라」­. 상당히 엄밀성을 가장한 유언비어가 요즘 시정에 한창 나돈다.
국민당이 구내방송으로 전달했다는 후보지지율 결과는 조사기관으로 알려진 KBS가 조사 자체를 한 적이 없다고 밝힘으로써 허무맹랑한 소문으로 끝났다. 모그룹의 비서실에 지지율 조사여부를 확인했더니 이 또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없다고 책임자는 밝혔다.
그런데 어째서 이처럼 허무맹랑한 흑색여론이 꼬리를 물고 있는가. 가장 큰 이유는 선거법 65조1항에 규정하고 있는 선거일 공고부터 후보와 정당에 대한 지지율을 공표해서는 안된다는 조항탓이 크다. 신문사마다,여론조사기관마다 대개 1주에 한번정도는 정당후보 지지율을 조사하고 있지만 발표할 수 없게 된 선거법 때문에 조사결과는 구전·와전을 거쳐 흑색 여론으로 뒤바뀐다. 여기에 정당이 가세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지지율을 조작하거나 악용할 소지도 있다.
권위주의 시절과 달리 이젠 유권자들도 권위있는 여론기관의 요청이라면 자신의 의견을 그런대로 솔직하게 개진할 만큼 표현의 분위기는 성숙되어 있다. 오히려 선거법이 이를 묶고 있으니 여론이 굴절·왜곡될 수 있다는 기현상이 이번 대선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신뢰받는 여론조사기관으로 「소프레」라는 회사가 있다. 소프레사는 대통령과 총리의 인기조사를 정기적으로 르 피가로지에 발표함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영향력의 배경에는 조사의 공정성과 신뢰성도 중요한 몫을 하지만 여론관계법의 운용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여론조사 방법에 대한 사전심의제가 그것이다. 필요한 경우 정부는 피조사자의 명단과 주소를 조사기관으로부터 되받아 발표전에 조사결과를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게 되어 있다. 편파나 허위조사는 금방 들통나게 된다.
우리도 여론조사 결과를 무조건 발표하지 못하게 해 흑색여론이 판치게 해서는 안된다. 여론조사의 신뢰성을 담보할만한 장치를 마련해서라도 여론의 향방과 대세를 가늠할 자료를 언제나 언론이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권영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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