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한국빙상 70년 한푼 오륜 첫 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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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순간은 그것이 이미 예고된 것이라곤 해도 가슴을 끓게 하는데는 변함이 없다.
지난 2월21일 새벽(한국시간) 프랑스 알베르빌 올림픽 아이스홀.
선명한 파란색·노란색이 엇갈려 배합된 한국선수 유니폼이 코너 안쪽을 파고들며 총알처럼 선두로 나서는 모습이 번쩍 눈에 띄었다.
김기훈(26·단국대 대학원)이었다.
세바퀴째에서 예기치 못했던 선두를 빼앗긴 블랙번(캐나다)은 마치 야차처럼 김기훈의 발뒤꿈치를 물고 늘어졌다.
다섯바퀴째-. 4위를 질주하던 한국의 이준호(단국대)가 맥밀런(뉴질랜드) 을 따라 잡았고 여세를 몰아 블랙번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현장에서 이 순간을 지키던 보도진은 물론 TV를 통해 겨울 올림픽 사상 첫금메달의 꿈을 기대하던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은 이때부터 정신이 없었다.
그저 김기훈·이준호를 따라 고개를 빙글빙글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한 순간 블랙번·김기훈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가 싶어 복받치던 감격이 일순 턱에 찼으나 노련한 김기훈은 상대의 추월 기도를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마침내 골인. 알베르빌 겨울 올림픽에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쇼트트랙남자 1천m에서 김기훈이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1분36초76의 세계신기록으로 한국의 겨울스포츠 70년 사상 첫 금메달. 비록 이 순간엔 지나치고 말았지만 이준호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과론이긴 해도 블랙번으로 하여금 김기훈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을 견제토록 한 이준호의 협공작전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몽블랑을 정점으로 하는 알프스 은령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틀 후 김기훈은 이준호·모지수(단국대) 송재근(광문고)과 함께 5천m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추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주인공이 됐고 올림픽 2관왕으로 매달 1백95만원이라는 엄청난 체육연금 수혜자가 됐다.
새로운 스포츠인 쇼트트랙에 입문, 88년부터 부동의 세계 정상을 지키고 있는 김기훈은 올림픽이 끝난 후 곧바로 대표팀에 합류해 변함없는 훈련을 계속해오고 있는데 제3회 아시아컵대회(12∼13일·북경)출전을 위해 지난 2일 현지로 떠났다. 김기훈은 비록 연령초과로 내년2월 폴란드에서 열리는 겨울 유니버시아드엔 출전하지 못하나 94년 릴리하머 겨울올림픽을 마지막 목표로 선수 생활을 마감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김인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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