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26. 충무로 성림다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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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택시 다섯대를 굴리는 '경영자'가 됐을 때 나는 변화의 시기가 왔음을 느꼈다. 먼저 운수업 관련 사업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답십리에 있는 어느 정비공장이 새 경영자를 찾고 있었다. 원래 주인은 시설을 내놓고, 내가 경영을 맡는 합작 형식으로 정비공장을 운영하기로 했다. 성진자동차공업사였다.

원래 주인이 운영했을 때는 쌓이는 적자로 문 닫기 직전이었던 이 공장은 내가 경영을 맡으면서 활기를 띠었다. 비결은 없었다. 고장난 차량이 들어오면 확실하게 고쳐주고, 코피를 쏟더라도 밤낮 없이 일해 약속한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영세 기업에게 가장 좋은 마케팅 수단은 고객의 입소문이다. 입소문의 재료는 '신뢰'이다. "그 정비공장에 가면 확실하게 해결된다"는 믿음을 얻은 운전기사들이 입소문을 내면 고객은 늘어나게 돼 있다.

얼마 후 나는 성진자동차공업사를 단독으로 경영하게 됐다. 그동안 내 소유의 택시 수도 늘어났다. 중견 택시회사의 모습을 갖췄다.

자금 여유가 생기자 투자를 권유하거나 새 사업을 소개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은행원 시절 동료들도 찾아왔다.

"우리 은행에 저당잡힌 제법 큰 규모의 땅이 고척동에 있는데 어떤가, 잡아두지 않으려나."

"고척동이라면 영등포 너머에 있는 버려진 땅 아닌가. 그 땅을 잡아서 뭐하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으로 돈 버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 그런 방법으로 돈 번 사람을 경멸한다. 그 일을 시작하는 순간 기업인 대열에서 벗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은 쓸모가 없지. 그러나 정비공장에다 택시만 굴리고 평생 살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중에 무슨 공장을 세우려면 부지가 필요할 테고, 고척동은 공장지대로 적격이거든. 게다가 아주 헐값으로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야."

장차 공장 부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그 땅을 잡았다. 결국 이 땅에 공장을 짓지는 못했으나 훗날 우유공장을 세울 때 도움이 됐으니 당초 용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셈이다.

일탈(逸脫)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방 영업에 손 댄 것이 대표적인 일탈이었다.

그 무렵 다방은 일종의 문화센터였다. 제조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시절이라 다방 영업이 해볼 만한 사업으로 대접받았다. 충무로 입구의 성림다방은 1960년대 서울에서 소문난 다방 가운데 하나였다.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 선생은 시 '다방'에서 60년대 다방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다방이 문화.예술인의 응접실 역할을 하지만 밀수꾼.탈세범.사기꾼.한량 등도 드나드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다방은 '사업'으로서는 문제가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주먹'들과의 관계였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다방은 술집.여관.윤락업소 등과 함께 주먹들의 주요 밥벌이 무대였다. 다른 주먹으로부터 다방 영업권을 보장해주고 대신 돈을 뜯어가는 주먹은 다방 주인과 공생관계였다. 어느 날 다방에 들렀다가 충무로 거리에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주먹들이 에워쌌다.

한낮 대로에서 나 혼자 예닐곱명의 주먹과 맞붙는 싸움이 벌어졌다. 일방적으로 터지는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온 몸에 피멍이 드는 처참한 모습이 돼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가족들은 당장 다방 영업을 그만두라고 했다.

주먹들과의 문제는 온몸으로 맞서 해결했으나 사업으로서의 발전 가능성은 작았기 때문에 나는 다방을 접고 운수업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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