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한국 스파이로 몰린 러 외교관 책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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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나는 어떻게 한국의 스파이가 됐나'.

한.러 수교 이후 최악의 외교 분쟁으로 기록된 '스파이 사건'의 주인공 발렌틴 모이세예프(57)전 러시아 외무부 제1아주국 부국장이 명예회복을 선언하며 내놓을 책 제목이다.

1998년 7월 한국에 비밀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한 모이세예프는 내년 1월 말 출판 예정인 책에서 "나는 결코 스파이가 아니었으며 한국에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는 러시아 지도부의 심리와 연방보안국(FSB.러시아 정보기관 KGB의 후신)의 실적주의가 맞물려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27일 기자와 만난 그는 "한국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고 서운해했다. 단독 입수한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나는 희생양='스파이 색출 작전'은 96년 주한 러시아대사관이 한.러 외교 관련 정보들이 유출된다는 보고를 외무부 본부와 FSB로 올리면서 시작됐다. 유출 정보는 ▶옛 주한 러시아대사관 부지 보상 문제▶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무기 수출 등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외무부 본부는 서울의 러시아 대사관이 협상에 진척이 없자 변명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고 무시했다.

그러나 FSB는 2년여에 걸쳐 모스크바 주재 한국 대사관 직원들에 대한 추적과 통화 감청.도청 등을 했다.

그 와중에 자신(모이세예프)의 아파트 도청에서 '러시아의 대(對) 한반도 정책'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한국 외교관에게 전달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이 문서는 내가 국제회의에서 공개리에 발표한 원고로 아무런 비밀 정보도 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정보기관이 스파이를 조작해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도를 넘은 한국 외교=FSB의 작전은 지나칠 정도로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러시아 주재 한국 기업인과 외교관들에게 러시아 권력기관이 속상해하던 상황과 맞물려 있다. 쏟아지는 한국 상품 광고는 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전문가들은 또 83년 사할린 KAL기 폭발사고, 북한 벌목공 문제, 북한 인권 문제, 한국전쟁 발발 원인 등에 러시아 언론들이 관심을 보이는 배후에 한국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96년 10월 발생한 최덕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 살해 사건 때는 수사 진척을 위해 돈을 대겠다고 나서 러시아 측의 심기를 자극하기도 했다. 러시아 지도부는 '오만한 한국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작심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실이 된 것이다.

◇정부 상대 소송 진행중=징역과 함께 재산 몰수 판결을 받은 모이세예프는 최근 법률회사에 취직한 부인과 광고회사에 다니는 딸의 많지 않은 수입에 의존해 살고 있다. 그는 지난 7월부터 유럽인권위원회에서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그는 "이번 재판에서 승소해 무참히 짓밟힌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한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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