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대통령 발언이 문제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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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 1년간 사사건건 충돌해 온 청와대와 야당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간의 갈등 관계의 결정판을 내놓고 있다.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있었던 한 모임에서 유권자들이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결과가 된다는 발언을 통해 두 야당을 한꺼번에 자극하고 나섰다. 이에 뒤질세라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대통령 발언의 위법성 여부를 따져보자고 나서고 있다. 정치경쟁을 굳이 이분법적 대결로 몰아가는 대통령의 발언이나 이를 기어코 법의 영역으로 끌고 가려는 야당의 행태는 모두 씁쓸하다.

대통령이 국정운영이라는 중립적 직무와 선거운동이라는 당파적 역할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늘날의 대통령제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대표적인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이라크 전쟁을 자신의 재선전략에 활용하기에 여념이 없다. 지난 여름 이라크에서의 전쟁종료를 선언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하며 전시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한다든지 최근에는 후세인 대통령의 체포를 선거운동의 전환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대통령에 의한 선거운동의 상시화(permanent campaigning)가 갖는 문제점들을 우리의 경우에는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법률적인 측면이다. 야당들은 대통령의 선거용 발언이 불법 사전선거운동이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야를 떠나 대부분의 후보자가 법정선거운동 기간을 준수하지 않고 있고, 또한 법정 선거운동 기간이라는 법 조항의 의미가 크게 퇴색된 상황에서 야당의 공세는 초점이 제대로 맞춰져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대통령 발언의 더 심각한 측면은 그것이 청와대라는 공간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국가 예산에 의해 운영되고 국정이 논의되는 장소에서 이루어진 대통령의 선거용 발언은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앨버트 고어 전 미 부통령은 재직 시절에 자신의 재선 선거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백악관의 공용전화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조사받은 적이 있다. 대통령도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국가의 예산이나 직무의 개입을 금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법 현실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관해 아직 적절한 법적 규제 장치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대통령의 선거운동은 직무상의 성과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대통령이 갖고 있는 최대의 자산이자 의무는 경제.사회.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엄청난 정책결정의 권력이다. 따라서 그의 선거운동도 이러한 정책결정의 성과에 기반해 이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유권자들도 대통령이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면, 지난 1년 동안 자신들의 살림살이 혹은 국가경제가 과연 얼마나 나아졌는가를 따져보면서 지지 정당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만일 지난 1년간의 경제지표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적 성과 대신 자신이 외교 분야에서 쌓아 온 실용주의적 접근의 성과를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盧대통령은 이러한 직무수행에 기반한 선거운동에는 크게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지난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에게 있어 선거는 여전히 개혁과 반개혁 혹은 신구 세력이 싸우는 이분법적 대결의 무대인 듯하다. 따라서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개혁이고 민주당이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반개혁으로 구분하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내년 선거에서 세 정당의 수많은 후보를 그 같은 이분법적 구분으로 재단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정리해 말하자면, 盧대통령이 국정수행과 선거운동이라는 이중적 역할 속에서 후자 쪽으로 계속 기울게 된다면 비단 내년 선거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우리 정치의 앞날은 줄곧 험난하리라는 우울한 예측을 할 수밖에 없다.

장 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