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환상적인 문화공약들/정규웅(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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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0년대 후반 미국의 한 정치학자는 문화인·지식인에 대응하는 권력자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는 문화인·지식인들이 내놓는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유형,둘째는 무조건 침묵하게 하는 유형,셋째는 국민으로부터 불신받게 하는 유형,넷째는 그들을 매수하는 유형 등 네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을 두번째 유형의 대표적 예로 꼽았고,미국 존슨행정부의 대문화인·지식인 정책을 세번째와 네번째 유형의 가장 비근한 예로 보았다.
○집권차원에서만 생각
문화인·지식인에 대한 권력자의 태도가 한나라 문화정책의 기본적 방향을 설정하게 되고,그에 따라 문화발전 여부가 가시화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이후 역대 정권의 최고권력자들이 문화예술인과 지식인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를 돌이켜보는 일만으로도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대 최고권력자들이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문화예술인이나 지식인들을 권력의 「편」에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다. 온갖 달콤한 미끼를 동원해도 권력의 편에 서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소불위의 「힘」과 술수를 동원해 그들을 침묵케 하거나 국민으로부터 이반시켰다.
문제는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문화예술인들을 권력의 편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 다만 통치술의 차원에서였을뿐 순수한 문화적 의식이나 문화적 감각의 차원에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문화예술의 창조성·독립성을 무시한채 문화예술이 정치적 영향력의 테두리안에서만 서식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소위 어용문화인·지식인들이 양산됐던 것도 그 까닭이다.
이데올로기가 상충하는 경우는 더말할 것도 없고 정치권력과의 협력자·동반자적 관계에 있지 않은 모든 문화예술과 지식을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도 근본적으로 최고권력자에게 문화의식·문화감각이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풍조는 당연히 문화의 들러리현상을 초래했다. 권력자들은 한결같이 문화를 좋아했지만 정작 그들이 좋아했던 것은 허상의 문화였고,말뿐의 문화였다. 가령 정치가 아무리 혼탁해도 꼬리표처럼 문화를 붙여 「정치문화」라고 하면 참으로 이상적 형태의 정치로 탈바꿈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군사문화」도 마찬가지다. 실로 문화의식,문화감각이란 찾을 길 없는 「문화의 유행시대」를 실감케 해온 것이다.
○들러리처럼 끌려다녀
이번 대통령선거를 앞둔 각 정당후보들의 캠페인에서도 「문화」는 어김없이 들러리처럼,그러나 약방의 감초처럼 끌려다니고 있다. 경쟁하듯 쏟아져 나오고 있는 문화공약들이나 「문화가 앞선 민족이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5천년 문화예술의 긍지로 문화선진국으로 만들겠습니다」는 따위의 캐치프레이즈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제 한국은 문화국가·문화국민으로 발돋움하게 되어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할 정도다.
그러나 각 정당 후보들이 내놓고 있는 문화관련 공약이나 캐치프레이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것이 오랜 시간동안 연구·검토끝에 신중하게 마련된 것이 아닌,주먹구구식의 즉흥적 발상임을 쉽사리 간파할 수 있게 된다. 우선 공약속에 들어있는 우리 문화예술계의 수십년에 걸친 해묵은 문제들이 「개혁」,「개선」,「활성화」,「보호육성」 등 한마디 말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인지부터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 정책으로 문화예술인의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어느 정당의 공약에 대해 한 예술인은 『당연한 일인데도 막상 그 대목을 보니까 「간섭을 하겠다」는 말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 털어놓았다.
문화공약의 신중성에 대해서 더욱 의심이 가는 것은 한 정당이 『정부예산 0.43%에 불과한 문화예산을 1% 이상으로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자 뒤이어 또다른 정당은 『0.3%의 문화예산을 우선 2배로 늘리겠다』는 공약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수치가 달리 나타나고 있는 것도 물론 문제지만 거두절미한 이같은 공약은 『정부예산 그 자체를 2배로 늘리겠다』는 공약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문화예산을 5배쯤 늘리겠다고 공약하지 않은 것을 그나마 양심적이라고 해야 할까.
○의식·감각부터 익혀야
그같은 문화공약 속에는 문화는 어차피 들러리고,그러므로 문화에 대해서는 무슨 공약을 어떻게 해도 그만이라는 극히 비문화적인 의식이 숨어 있지나 않은지 묻고 싶다. 정당이고,후보고간에 문화공약을 쏟아내기에 앞서 우선 갖춰야 할 것은 문화의식·문화감각임을 깨달아야 한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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