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거라, 네 슬픔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뜻과는 다르게 전달되는 말과 아무 때나 울리는 전화벨 소리, 휙휙 내달리는 자동차와 느닷없이 찾아오는 방문객. 어디서나 뒤집어지고 있는 땅들…. 도시와 사람들 속에서 짙은 피로를 느낀 소설가 신경숙(40.사진)씨는 얼마간이라도 스스로를 유폐시키기 위해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다.

9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먼바다로 가보고 싶었던 신씨는 마침 우연히 만난 한 처녀와 함께 돈을 합쳐 배를 탄다. 노을에 감탄하다 왈칵 울음을 터뜨린 처녀는 뭍으로 돌아올 때까지 목놓아 운다. 전복죽 사주면 방에서 재워주겠다는 신씨의 제안에 처녀는 '운 사연을 묻지 않겠다면'이란 단서를 단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보니 처녀는 메모 한장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상처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동정을 바라지 않는 처녀의 결연함에 마음이 움직인 것일까. 신씨는 그길로 짐을 챙겨 서울로 돌아온다.

올해 문화일보에 연재했던 사진에세이를 책으로 묶은 '자거라, 네 슬픔아'는 어머니의 수의, 창밖으로 은사시나무가 보이던 방, 영화 보는 내내 서럽게 울었던 친구 미순 등 가감없이 풀어낸 신씨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씨의 맨얼굴을 만날 수 있다. 구본창씨의 여백 많은 사진도 만날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