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이연숙(국제존타 서울클럽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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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유대계 미국작가 하임 포톡이 쓴『한줌의 흙』(최근 한국에서도 번역·출판되었음)이라는 소설에는 한국전쟁 중에 피난 가던 노부부와 피난길에서 만난 죽어 가는 한 소년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읽어가면서 주인공들의 성격을 보면 노인남편은 화 잘내고 성급하며 다분히 이기적인 면이 드러나고, 노부인는 인간적이고 지혜로우면서 차분히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성품으로 그려지고 있다. 소년은 창의적이고 임기응변적인 재질이 엿보인다.
비교적 서양사람들 중에서 남성 우위적 생각을 가진 유대계 미국 작가가 어떻게 해서 여성을 이렇게 훌륭하게 묘사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터에 얼마 전 그 작가 부부가 한국에 강연하러 왔었다. 하임 포톡은 한국전 직후인 1956년부터 동두천 근처에서 16개월간 머무르면서 업무상 많은 지역을 볼 수 있었고, 종군 랍비(유대교 사제)로서 많은 한국 사람들과 사귄 적이 있는 인상 좋은 노신사였다.
『어떻게 해서 당신의 작품 속에 한국의 여성이 그렇게 지혜롭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그려졌느냐』는 질문에 포톡은 서슴지 않고 답했다.『내가 한국에서 만나본 여성들을 그대로 그린 것입니다. 내가 본 바로는 한국의 남성들은 대체로 평상시에는 근엄하고 절도 있어 보이며 위풍이 당당한데 일단 위기가 닥치거나 극한 상황이 벌어지면 쉽게 좌절하고 빨리 단념하며 이기적으로 두서없이 흐트러지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뒷전에서 대접받지 못하던 한국의 아낙네들이 사람이 죽어 가는 전쟁터에서 굳세게 식구들을 챙기고 보살피며, 부서지고 파괴된 폐허 속에서 깨어진 조각들을 주워 모으고 쓰러진 집의 기둥과 서까래들을 다시 모아다 움막이라도 세워 일으켜 정돈해나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은 나 스스로도 여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힘들게 살아오는 동안 여성이 남성만큼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오던 터에 포톡의 객관적인 관찰은 나에게 한국여성의 능력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동시에 여성들 모두에게 내 깨달음을 나누고 또 우리의 동반자인 남성들에게도 여성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인지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졌다. 특히 위기에 발휘되는 여성의 안정 지향성 창조 역량을 오늘의 불안한 사회현상을 개선하는데 크게 활용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필자 약력 ▲35년생 ▲미국공보원 상임 고문 ▲국제 존타 서울클럽회장·한국 여협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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