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44. 월드컵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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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월드컵대회에서 필자와 한 팀을 이뤘던 김승학 프로. [중앙포토]

월드컵골프대회는 단체전과 개인전을 병행한다. 1966년 대회는 가까운 일본 도쿄에서 열렸기 때문에 나는 컨디션 조절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런대로 샷이 잘 맞아 나는 3라운드까지 언더파를 기록했다. 그러나 홍덕산의 샷이 망가졌다. 그는 국내에서 만큼 힘을 쓰지 못했다. 장타자가 아닌 그가 첫 상대인 푸에르토리코 선수의 샷에 신경을 쓰느라 흔들렸던 것이다. 보기.더블보기를 거푸 범하는 바람에 우리는 단체전 에서 20위 밖으로 밀려났다. 개인전에서 4, 5등을 달리던 나는 팀플레이에 신경을 쓰다가 4라운드에서 무너져 오버파를 쳤다. 개인전에서도 20위 안에 들지 못했다. 결국 26개국이 참가한 단체전에서 우리는 23위에 그쳤다. 경험 부족이었다. 하지만 한번 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캐나다컵은 67년에 중단됐다가 이듬해 이름을 월드컵으로 바꿔 다시 열렸다. 내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월드컵대회는 71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제19회 때였다.

그때 파트너는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던 김승학이었다. 나와 김승학은 연습라운드를 돌면서 "코스가 너무 어렵다"며 걱정했다. 파4 홀이 450야드 짜리도 있었고, 비까지 내려 드라이버샷 거리도 나지 않았다. 특히 그린이 매우 빨라 퍼팅이 힘들었다. 긴 러프, 해저드 등이 국내 골프장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난도였다. 우리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다음날 김승학이 늦잠을 잤다. 월드컵 주최 측은 출전 선수에게 2인 1실로 호텔방을 제공했는데 룸메이트인 내가 몇 번을 깨워도 김승학은 "좀 더 자렵니다"며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김승학보다 한참 선배였고 팀의 주장이었다. 버릇을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목욕탕으로 갔다. 컵에 찬물을 가득 담아 자고 있는 그의 얼굴에 확 뿌렸다.

"어이쿠" 소리와 함께 김승학이 벌떡 일어났다. 나는 "늦잠이나 자고 그 따위로 하려면 집어치워"라고 다그쳤다. 그는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며 사과했다. 한편으론 미안했지만 후배를 성실하게 만드는 데는 '찬물 처방'이 그만이었다.

우리는 곧장 연습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회에서 기적같은 성적을 냈다. 2번 아이언으로 세컨드샷을 했는데 공이 핀 옆에 붙어 버디를 잡기도했다. 역대 최고 성적인 5위에 입상해 상금도 꽤 많이 받았다.

2002년 멕시코대회 때 최경주와 허석호가 3위에 올라 나의 최고 성적 기록은 깨졌다. 하지만 당시 한국골프 수준으로는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비가 올 때 필드에서 힘의 차이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물기에 공이 잘 구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가 오거나 비가 그친 뒤 잔디가 젖은 상태에서는 한 클럽을 길게 잡고 부드럽게 친다는 생각으로 코스를 공략해야 한다. 가벼운 공을 택하는 것도 방법 가운데 하나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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