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수학교사 "36년 거미연구 집대성" 한국 최대 원색도감 만든다|거미박사 남궁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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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거무튀튀하고 음침한 모습이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거미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남궁준씨(72). 그는 「사람들이 보기만 하면 때려 죽이려 하는」 그 하찮은 거미를 찾아 일생동안 전국의 동굴과 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사람이다.
그가 약 40년 동안 채집한 거미표본은 10만여점. 그는 한국의 산하에 우리와 함께 살아 숨쉬는 「거미식구」들을 모조리 밝혀내 알려주는 한국최대의 「원색거미도감」을 만드는 일에 막바지 정열을 쏟아 넣고 있다.
중학교 수학선생님 출신인 그는 요즘 생식기의 차이로 구별되는 거미의 종류를 파악, 분류하기 위해 하루종일 현미경에서 시린 노안을 떼지 않고 있다. 그가 거미에 미쳐 「거미박사」가 된 계기는 지극히 우연한데서 비롯됐다.
37세이던 지난 57년 충북 음성의 무극중학교 교사로 일했던 그는 당시 교사가 부족해 수학에 생물까지 병행해 가르쳐야했다. 당시 문교부에서는 각 학교에 「전국과학전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낼 것을 강요했고 생물선생이기도한 그는 할 수 없이 이에 응해야했다.
『산골에서 무얼 어쩌란 말인가.』 내심 고심했던 그는 『이왕 할 바에는 남들이 안 하는 독특한 것을 하자』고 생각한 후 학생들을 데리고 거미채집에 나섰고 3백50여 「충북의 거미」를 설명과 함께 출품한 그와 학생들은 문교부장관상을 거머쥐었다는 것.
한 산골학교의 「기이한 연구」는 당시 적지 않은 호기심의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남궁씨는 전했다.
그는 거미를 잡아 현미경을 들이대고 생식기를 살펴 종류와 암수를 구별하기 위해 거미를 「주무르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점차 거미의 「오묘한 자태 」에 빠져들었고, 특히 아무도 이쪽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 「거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됐다는 것이다.
산골에 사는 그에게 거미는 무궁무진하게 잡혔다. 그는 학교가 끝나는 오후와 휴일에는 거미채집을 하러 온 산야를 헤집고 다녔다.
도시로 발령이 나도 그는 거미잡기 좋은 산골학교를 자청해 충청북도에서만 17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거미가 음습한 곳을 좋아하는 만큼 그는 우리나라에 있는 3백여 개의 동굴을 「제집 드나들 듯」 모조리 섭렵했다. 때로는 미로 같은 동굴 속을 헤매다 길을 잃거나 넘어져 머리를 다치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이 지구상에는 모두 4만여 종, 우리나라에는 약5백50종의 거미가 서식하고 있다는 것.
그가 갖가지 자료를 토대로 파악한 바에 따르면 5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거미는 모두 98종이었으나 실물로 전해진 것은 60여종에 불과 했다는 것,
현재 밝혀진 5백50종 중 남궁씨가 발견한 것만 2백여종에 이른다고 밝힌다. 거미는 생식기의 구조가 같아 서로간에 교미, 번식이 가능한가의 여부에 따라 종류를 구분하는데 한국에 가장 많은 것은 접시모양의 그물을 치는 접시거미, 넓은 공간에 크고 둥근 그물을 치는 왕거미, 팔딱팔딱 뛰어다니면서 그물은 치지 않는 깡충거미, 불규칙하고 조그만 그물이 특징인 꼬마거미 등의 순으로 서식하고 있다는 것.
그는 요즘 자신이 잡은 거미를 조사·연구·분류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이 작업이 끝나면 자신이 잡은 1백 종 정도를 신종으로 추가 발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또 동굴의 환경에 따라 색이 하얗게 변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40∼50여 종의 거미도 보여줄 수 있으리라한다.
그는 이제 그의 노안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몸통길이 0.8㎜의 깨알거미도 갖고있다고 자랑한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거미는 0.4㎜라는 것.
동굴을 제집 드나들듯 하다보니 그에게 또 하나 붙은 이름은 「동굴생물학자」. 이제 거미 외에도 갈르와벌레, 장님좀딱정벌레 등 희귀 동굴생물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그가 가장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세계적 희귀종으로 4억년 전부터 이 지구상에 존재해 화석곤충으로 불리는 갈르와벌레를 우리나라에서 66, 73, 86년에 3종을 각각 발견한 일이다. 프랑스나 일본 등지의 학자들이 좀 보여달라고 간청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동굴생물학자에게는 소중하게 취급돼오고 있다.
그는 거미의 구석구석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관찰하다보면 「아름답고 오묘한 신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충북에서의 17년간 교사생활, 서울 생물학자들의 권유로 서울로 이주한 후 청운·서대문중학 등을 거쳐 85년 불광중 수학선생님을 끝으로 교단에서 은퇴한 그는 지금은 한국거미연구소의 전문위원으로 아무 시간제약 없이 거미를 연구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거미연구소는 그로부터 거미에 관한 논문지도를 받은 학생이 교수가 되어 설립한 연구소로 은사인 그에게 소장직을 맡아줄 것을 간청했으나 그는 번거로움이 싫어 이를 고사하고 있다.
서울 오륜동 선수촌 아파트 자택 3평 남짓한 그의 방에는 10만 마리의 거미가 알콜 속에 들어있는 손가락 크기의 페니실린 병들, 거미들의 사진, 그림, 관련 문헌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 남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분야에 외롭게 정진해온 거미박사의 일생이 숙연하게 펼쳐져 있는 듯 했다.
이제 눈이 어둡고 손이 떨려 거미관련 논문을 쓰는 한 대학원생이 도와주어야 거미생식기구조도를 가까스로 한 장, 두 장 완성할 수 있다는 그는 올해 말로 예정했던 도감출간이 자꾸 늦어져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내가 만든 도감만 가지면 전문가나 아마추어 모두 거미에 대해 훤히 꿰뚫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늘 의자에 앉아 도감 만들기 작업에 매달리다보니 최근 들어 체력이 부쩍 떨어짐을 느낀다는 그는 『일생동안 거미를 제대로 알기 위한 진리탐구를 해왔고 이로써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그 속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고 살았으니 이 어찌 진선미의 삶이 아니겠느냐』며 활짝 웃어 보였다. <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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