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7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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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참 이상한 일이다. 둥빈 아빠의 죽음, 코코의 죽음, 그리고 솔직히 듣기도 싫었던 신부님의 강론 때문에 밥을 먹고 싶지 않았는데, 초밥은 언제나 맛있었다. 둥빈도 제제도 잘 먹었다. 엄마는 맥주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엄마가 흐뭇한 표정으로 접시를 쌓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있잖아 지금 말구…. 나중에 한 오십 년쯤 후에 그러니까 제제가 환갑쯤에… 엄마… 죽으면…."

둥빈 아빠의 죽음을 접하고 나는 실은 아빠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죽는다, 라는 말을 꺼내자, 목이 메어왔고, 짜증도 좀 치밀었다.

"내가 환갑이라구?"

제제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생각을 하자 나도 웃음이 좀 나오긴 했다.

"그래 제제가 환갑쯤에 엄마가 죽으면, 오늘처럼 일 년에 한 번씩 너희 모두 모여서 미사를 하고 밥을 먹어주었으면 해. 엄마가 바라는 건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리고 그때까지 엄마가 시골집을 팔지 않았거든 강원도 시골집 느티나무 밑에 엄마의 재를 묻어줘. 시신은 기증할 수 있는 데까지 다 기증하고. 이게 끝이야. 미안, 우울한 이야기 한 대신 엄마가 금가루 초밥 한 접시씩 사줄게."

훗날 나는 엄마의 인터뷰 기사에서 엄마가 써달라는 묘비명을 읽었다.

-나 열렬히 사랑하고 열렬히 상처받았으며, 열렬히 슬퍼했으나 이 모든 것을 열렬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으니, 이제 좀 쉬고 싶을 뿐.

집으로 걸어오면서 엄마는 우리가 굳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장면보다 비싼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우리에게 사주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신호등에 서 있는데 엄마가 나를 불렀다.

"집에 서저마가 와 계실 거야. 동생들 재워. 이 닦았나 꼭 검사하고…. 엄마… 좀 늦을 거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거라."

나는 직감적으로 엄마가 술을 마시러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 곁에 있을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니엘 아저씨가 될 것이라는 것도 느꼈다. 그 와중에도 그것이 조금은 서운했다.

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서저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서저마는 그녀 특유의 담담한 얼굴로 "이 닦아라""일기 써라" 등등 엄마를 대신한 잔소리를 해댔다. 서저마의 담담하고 약간은 무뚝뚝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표정이 신기하게도 나를 조금 차분하게 했다. 잘 준비를 하다가 나는 둥빈 방으로 들어갔다. 둥빈은 책을 들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뭐 읽어?"

내가 묻자 둥빈은 "어… 그냥 읽던 거"하고 대답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둥빈이 "누나, 해리포터 6부는 언제 나와?"하고 물었다. 난데없는 질문이었는데, 순간 가슴 한구석으로 칼로 긋는 듯한 통증이 지나갔다. 눈이 따끔거렸다.

"몰라…. 지금 조앤 롤링이 쓰고 있다잖아."

나는 애써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거 빨리 좀 못 쓰나?"

둥빈은 안경을 올리며 그렇게만 말했다.

"그게 그렇게 쉽니? 엄마 봐라. 일 년에 한 편도 못 쓰면서 맨날 엄살이잖아."

"그러네…. 엄마도 작가였네…. 엄마도 술 덜 마시고 우리한테 잔소리할 시간에 쓰면 좀 빨리 쓰지 않을까?"

"그래,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조금 있다가 자."

나는 둥빈의 방을 나왔다.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아서 얼른 방을 나오는데 둥빈이 나를 불렀다. "응?" 하고 돌아보니까 둥빈은 무슨 말인가 할 듯하더니 "아니야, 누나 아무것도 아니야"하고 말했다. "둥빈아, 누나는 네가 내 동생이라서 참 좋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남자애들한테는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안 잡힌다. 그래서 나는 겨우 이렇게만 말했다.

"이따가 정 잠 안 오면 누나 방으로 와…. 누나가 너 좋아하는 컵라면 끓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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