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40. 김성곤 쌍용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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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 회장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골프를 즐겼다. 성격이 화통해서 그와 골프를 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중앙포토]

고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자도 골프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분이다.

콧수염을 길러 멀리서 봐도 금방 알 수 있었던 김 회장은 이순용 초대 서울컨트리클럽 이사장의 뒤를 이었다. 제 2,3,4대 서울컨트리클럽 이사장을 지냈고 제 3대 대한골프협회장을 맡아 한국골프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김 회장은 체격이 우람했다. 신장이 1m70cm를 넘는데다 몸집도 컸던 김 회장께서는 화끈한 샷을 날렸다. 1950년대 당시 골프를 즐겼던 1세대 골퍼 중 단연 거리에서는 선두주자였다.

김 회장은 박숙희씨라는 분과 장타 경쟁을 벌였다. 김 회장은 경쟁이 있을 때마다 "자네가 같이 돌면서 심판 좀 봐라"고 해서 라운드에 종종 동반했다. 두 분의 장타대결은 좀처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박빙의 승부였다.

김 회장의 골프파트너는 아주 다양했다. 국회의원이기도 했던 그 분은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지냈다. 여당의 돈을 관리하는 자리여서 많은 분들과 필드에서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박종규 경호실장, 길재호 의원, 국회의원을 지낸 신용남 대한골프협회 고문,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등과 골프를 즐겼다. 김 회장은 대부분 파트너를 초청하는 입장이었다. 성격이 화통하고 사나이다운 그분과 라운드를 원하는 골퍼가 많았다.

김 회장은 내기도 꽤 크게 했다. 내가 직접 내기하는 것은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신진자동차 김창원 사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이 거액의 내기를 했던 멤버였다. 막판 홀에 가면 당시 돈으로 한 타에 100만원까지도 간다는 말을 들었다. 100만원이면 집 한 채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우울한 말년을 지냈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던 김 회장은 1971년 야당이 낸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에 동조했다가 중앙정보부로 끌려 갔다. 조사관들이 김 회장의 콧수염을 뽑히는 등 수모를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의원직도 잃고 정계를 떠난 지 몇 해 안돼 고인이 됐다.

그분은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만 그저 큰 소리 한 번 치는 정도였다. 월드컵대표로 뽑혀 당시 신문로에 있던 자택으로 인사를 하러 가면 "분전해서 국위를 선양해라"하시면서 300달러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을 내주셨던 기억도 있다.

초창기 골퍼들을 돌이켜 생각하다 보니 골프는 사람의 성격을 그대로 닮는 것 같다. 김회장은 호탕하게 시원시원한 골프를 쳤다. 이병철 삼성회장, 박두병 두산회장 등은 말수가 적으면서 아주 꼼꼼한 골프를 쳤다.

퍼팅이 약했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짧은 거리의 퍼팅을 놓쳐 화가 나면 퍼터로 공을 팍 쳐버려서 동반했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이었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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