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내 진짜 엄마는 TV 속의 저 가수일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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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의외의 수확이란 이런 것이다. '열세 살 수아'(김희정 감독)는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 같은 영화다. 불황에 빠진 충무로에 어떤 활로가 필요하다면, 신인 감독이 만든 이 7억원짜리 작은 영화가 참고가 될 것이라면 과장일까? '열세 살 수아'는 따뜻한 감성과 인간에 대한 예리한 관찰이 좋은 영화의 기준임을 잘 보여준다.

열세 살 수아(이세영)는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추상미)와 단둘이 살고 있다. 혼자 식당을 하는 엄마는 잔소리만 할 뿐 수아의 마음을 잘 몰라 준다. 아빠의 그림자는 의외로 깊다. 엄마가 고물상 아저씨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더욱 질색인 것은 그 고물상 아저씨가 자신에게 살갑게 구는 것이지만 말이다.

수아에게는 비밀이 있다. 친엄마가 스타 가수 윤설영(김윤아)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짜증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친엄마에 대한 환상 속으로 줄달음치는 수아. 친구 은지를 따라 놀러갔다가 경찰서까지 가게 된 수아는 급기야 친엄마를 찾아나선다.

영화는 제목처럼 열세 살 소녀의 성장영화다. 하지만 어른이 생각하고, 어른이 보고 싶은 여느 성장영화와는 다르다. 사춘기 초입, 아빠의 죽음이라는 상실감을 겪으며 사회적 그물망 안에서 살아가는 현실 속 소녀의 얘기가 담담하게 펼쳐진다. 감독의 바람대로 '진지한 성장영화', 거짓 없는 성장영화다.

'여선생, 여제자'에서 여교사와 연적 관계인 되바라진 소녀를 연기했던 이세영이 예민한 수아로 깜짝 변신한다. 영화 초반부 까칠한 수아가 '인형 소녀' 이세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꽤 걸릴 정도다. 예의 '화장기'를 지워 버린 이세영은 의외로 훌륭한 배우의 재목임을 입증한다.

영화는 사회적 현실을 원경(遠景)에 깔지만, 정색하지 않는다. 폴란드 유학파 출신인 감독은 예상과 달리 난해한 예술영화와 거리를 둔다. 수아의 퉁명스러운 대사, 문제아라기보다 '겁나게' 좌충우돌하는 소녀 은지의 에피소드가 객석의 웃음을 자아낸다.

카메라는 무채색의 현실과 마법 같은 환상을 적절히 섞는다. 자신의 열세 살을 돌아보며, 혹은 지금 열세 살 자녀와 함께 보면 좋을 영화다. 성장영화지만 성인의 관점으로 아이의 성장을 재단하지 않고, 가족영화지만 안이한 가족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미덕을 갖췄다.

물론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사춘기의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 감독 역시 "사건.줄거리보다 사춘기 소녀의 본질적 감정에 주력했다"며 "앞으로도 거대한 플롯 때문에 깎여져야 하는 사소한 감정에 대해 계속 얘기하겠다"고 말했다.

감독은 "2003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 상실감을 아이라면 어떻게 겪어낼까 궁금했다"고 밝혔다. 감독은 칸영화제의 신인 감독 지원프로그램(칸 레지던스)에 뽑혀 파리에서 이 작품을 썼다. 그간 '아버지의 초상' '만남' 등의 단편으로 시카고영화제.뮌헨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배우 추상미도 각별한 소감을 털어놨다. 그는 "처음으로 상대 배역이 탐나 출연을 결정했다"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등 수아와 내 경험이 흡사해, 영화를 하며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열세 살 수아'를 봤다"고 전했다. 자우림의 김윤아가 윤설영으로 출연해 강력한 '포스'를 발산한다. 자우림 멤버인 이선규.김진만도 처음 영화음악에 참여했다. 14일 프리머스시네마 전국 대부분 극장과 서울 종로 스폰지하우스에서 개봉. 12세 관람가.

주목! 이 장면
드디어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인 수아가 마음으로 아빠를 보내는 환상 장면. 청보리밭 길 수아를 태운 노란색 버스가, 밀짚모자를 쓰고 걸어가는 창 밖의 아빠를 스쳐 지나간다. 아빠의 뒷모습이 햇살 속으로 사라지고 버스는 계속 달리는 장면을 원경에 담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아의 말간 슬픔이 뇌리에 남는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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