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위기와 동아시아의 기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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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26면

영어의 ‘crisis’에 해당하는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를 합친 말이다. 정곡을 찌른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세계적 위기는 동아시아에 위험이자 기회다.
이라크 사태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미국이 불안정한 이라크를 뒤로하고 철수하면 어떻게 될까? 전 세계 이슬람 전사들은 성전(聖戰)에서 승리했다고 선포할 것이다. 테러 활동은 증가할 것이다. 미국은 ‘패전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하는 문제로 국내에서 쓰디 쓴 공방전을 벌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다른 국제문제에 소홀하게 된다. 세계가 순항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도력이 아직 필요하다. 미국이 상처 입는 것은 미국과 세계 모두에 나쁘다.

이라크는 동아시아에 기회가 되기도 한다. 2008년 미 대선은 이례적으로 일찍 시작됐다. 미 대선은 예측이 불가능한 것으로 악명 높다. 표를 위해서라면 미국 정치인들은 타국의 이익을 희생시키기도 한다. 1992년의 경우 빌 클린턴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베이징의 살인마 집단과 야합하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미ㆍ중 관계의 안정이라는 미국의 국가이익은 국내 선거정치의 희생양이 됐다. 2008년 미 대선에서도 동아시아에 피해를 주는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일자리를 동아시아에 빼앗기고 있다는 미국의 당혹감을 배경으로 미국의 어마어마한 대(對)중국 적자가 선거 이슈화돼 너무나 중요한 미ㆍ중 관계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중국뿐만 아니라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미국 국내 정치의 볼모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라크에 쏠린 관심 덕분에 동아시아에는 피해가 없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이라크 문제가 미국 대선에서 초미의 관심사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불만은 점점 누적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미국 정치인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로 인기를 얻으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이 이라크 침공에 찬성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많은 미국인은 철군이 옳다고 믿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 결정을 의회와 국민은 지지했다. 게다가 부시는 이라크 침공 20개월 후에 실시된 대선에서 재선됐다. 그러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 의회나 국민이 이라크에서 마무리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게 놀랍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진 부시 행정부는 보다 많은 우방과 동맹국을 얻기 위해 적극적이다. 이에 답하듯 중국 정부는 중국이 부시 행정부에 유용하다는 것을 능란하게 보여줬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2003년 5월 22일 이라크전을 ‘정당화’해줬을 때 어떤 고위 미 외교관은 중국이 결의안 통과에 협조해준 데 대해 미 행정부가 진심으로 고마워한다고 내게 전했다. 미ㆍ중 관계가 이라크 전쟁 개전 이후 견고해진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중국은 지난 몇 년간 북한 문제가 파국을 맞지 않는 데에도 기여했다. 중국 입장에서 미ㆍ중 관계를 안정시키고 일본의 핵무장화를 방지하는 것은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의 소형 핵무기 실험에 따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중국은 워싱턴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답례로 워싱턴은 천수이볜 대만 총통에게 새로운 위기를 대만해협에서 야기하면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러한 연결고리들이 말해주는 것은 국제정치에서 각 사안을 따로 떼어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라크전이 일으킨 먼지가 가라앉고 그 여파에 대한 논의가 끝나면 동아시아가 주요 수혜자라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가 이득을 얻는 것으로 예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통찰력 있는 국제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동아시아에 안정을 부여한 것은 중국 지도자들의 뛰어난 국제정치적 혜안이었다. 물론 그들의 정책목표는 중국 국가이익의 추구다. 그러나 아슬아슬할 정도의 고성장 경제를 운영해야 하는 중국은 중국뿐만 아니라 인접국들의 정치적 안정도 유지해야 하는 중요한 목표가 있다. 그래서 중국은 모든 인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집중해 왔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은 동아시아에서 드물게 평화롭고 풍요로운 기간이었다. 이는 중국의 현명한 지도력이 우리 지역에 이롭게 작용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워싱턴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국제정치적 혜안이 베이징에 버금가게 된다면 동아시아는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워싱턴에는 우수한 지도자들이 있다. 동아시아에 우호적인 이들도 많다. 부시 대통령은 올해 9월 역사적인 미국ㆍ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한다. 워싱턴이 동아시아에 대해 보다 일관성 있는 장기 전략을 구사한다면 훨씬 많은 것을 동아시아에서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전 중 동아시아에 이익을 안겨준 미국의 정책에 동아시아가 보답할 때가 됐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또한 합심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정교한 행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국이 이 지역에서 발을 빼는 것보다 낫다.

좋은 소식은 많은 미국 정책이 동아시아에서 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 지역의 모든 주요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최근 일본과 한국, 일본과 중국 간에 빚어진 마찰에 미국은 솜씨 좋게 대처해 왔다. 한편 미국은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력체(APEC)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등 자신도 포함된 이 지역의 여러 다자간 협력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미국이 이들 기구에 구사한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다. 미국은 이 지역의 다자간 협력에 대해 변덕스러운 태도를 취해 왔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심지어 일부 중요한 회의에 불참하기까지 했다.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의 다자간 협력을 미국이 보다 일관성 있게 지원한다면 이는 미국과 이 지역 모두에 이득이 될 것이다. 또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입은 정치적 손실을 상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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