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떠나도 그 삶은 살아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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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07면

성균관대 총학생회 제공

남기고 간 여인
시신 기증하고 떠난 토스트 할머니

아름다운 유산

5월의 마지막 날 오후 3시. 성균관대 학생들이 서울 종로구 청운양로원을 찾았다. “할머니의 유산”이라며 빨랫비누 11박스를 전했다.
지난 4월 11일 담낭암으로 생을 마친 조화순(향년 77세) 할머니는 1992년부터 성균관대 정문 앞에서 토스트와 어묵을 팔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눈과 비를 포장 하나로 막아가며 오후 3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일하는 고단한 나날이었지만 할머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른 포장마차보다 두 배쯤 두툼하게 부친 할머니의 1500원짜리 토스트는 학생들의 가슴까지 채워줬다. 성도훈(경영학과 4년)군은 1학년 때 먹은 ‘공짜 토스트’의 온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가, 천원만 내.” “어묵은 공짜야.” “추운데 이리 와서 포도주 한 잔 마셔.”
월세 30만원 내기도 힘겨워했던, 악성 뇌종양을 앓는 딸(37)과 백혈병에 걸린 손녀(11)의 병원비를 대기도 빠듯했던 할머니는 그렇게 학생들에게 사랑을 나눠줬다. 지난해 4월 할머니의 사정을 알게 된 학생들이 축제기간에 학교 안에서 할머니와 함께 토스트를 구워 팔아 그 수익금을 드리려 했지만, 한사코 하루 일당과 헌혈증만 받아갔다.

그해 9월 할머니가 담낭암에 걸렸다. 청주 꽃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성대 애기들이 보고 싶다”며 몰래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정재희(법학과 4년)군이 학교 게시판에 올리자 갓 스물의 신입생부터 40대 회사원이 된 졸업생까지 “우리 할머니” “우리 어머니”라며 애도했다. “시위가 있는 날엔 누가 다쳤나 걱정하고 새벽 순찰하는 경찰들에게도 어묵을 건네셨다.”(ID: windykid), “아르바이트하느라 힘들지 않으냐면서 한사코 돈(토스트 값)을 거절하셨다.”(ID: nexteam), “운전기사분들 드시라고 새벽 3시까지 일하셨다.”(ID: 알록이) 등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게시판에 하나 둘 쏟아놓았다. 그들 대부분은 그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 ‘토스트 할머니’라고 했지만 추모 행사를 열고 할머니를 기리는 문구와 그림이 새겨진 휴대전화 액정 클리너를 만들어 팔았다. 이렇게 모은 17만9000원으로 빨랫비누를 사 이날 청운양로원에 전달한 것이다. 토스트 할머니는 거액을 기부했던 ‘김밥 할머니’ ‘풀빵 할머니’처럼 돈을 남기진 못했지만, 학생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떠났다.
할머니는 세상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오롯이 주고 떠났다. 천주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서울 가톨릭대 의대 해부학 교실에 시신을 기증했고, 뼈 모형이 되어 ‘아가들’의 공부를 돕고 있다. 남은 육신은 화장해 용인 참사랑묘역에 모셔졌다.

남기고 갈 여인
남몰래 장기 기증 등록한 배우 김지수씨

신인섭 기자

그녀와 함께 걷자 사람들이 뒤돌아본다. 5월의 마지막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도산공원에서 배우 김지수(35)씨를 만나기까지는 참 어려웠다. 그녀가 ‘보고 또 보고’ ‘여자, 정혜’ 등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드는 스타 연기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얘기는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1588-1589, www.doner.or.kr)에서 들었다. 2005년 2월 예고도 없이 사무실에 불쑥 나타나 골수, 각막, 뇌사(腦死) 시 장기 기증까지 등록하고 갔다 했다. 당시 “연예인으로서 온 것이 아니니 외부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한 그녀의 뜻을 존중해 운동본부 측도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김씨는 여전히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언제 적 일인데… 홍보하려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며 자꾸만 인터뷰를 거절했다. “장기 기증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라는 말로 겨우 설득할 수 있었다.
“장기 기증은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했어요. 텔레비전을 보면 장기를 구할 수 없어 죽어가는 분들의 얘기가 나오잖아요. 어차피 죽으면 썩을 몸인데 남을 살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처음엔 사후 각막 기증만 가능한 줄 알고 찾아갔었는데 그날 설명을 듣고 한꺼번에 등록했어요.”

운동본부 관계자는 골수 등록을 위해 혈액 샘플을 채취해야 한다는 말에 바로 소매를 걷어올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골수 기증이 아프다고 해서 여쭤보니까 마취하기 때문에 뻐근한 정도라더군요. 뻐근한 거야 운동만 며칠 해도 그렇잖아요?” 김씨가 까르르 웃는다. 바쁜 연예활동 중에 2박3일 입원해야 하는 골수 기증을 할 수 있을까. “타인끼리 골수가 맞을 확률은 기적 같은 일이잖아요. 시신 기증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뭘. 전 별로 좋은 일 하고 산 적이 없으니까 그런 거라도 해야죠.” 서슴없이 대답한다. 그녀의 운전면허증엔 ‘장기기증’ ‘각막기증’ 이라고 씌어진 빛바랜 분홍색의 동그란 스티커 두 개가 붙어 있다. 만약의 사고가 생겼을 때 바로 장기 기증 절차를 밟기 위한 표식이다.
연기를 하다 보니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노라고, 좀 더 인생이 ‘깊어지면’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처음 하는 얘기”라며 조심스레 웃는다. 그녀에겐 앞으로도 살아갈 날이 많다. 그러니 남기고 갈 사랑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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