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학살 피해 8명이 화장실서 석달 … 거기서 영어 공부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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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지음
김태훈 옮김, 섬돌, 320쪽, 1만1000원

비극은 비극을 낳는 게 일반적이지만, 비극이 영웅을 낳고 미담을 만드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나치의 만행이 '안네의 일기'와 '쉰들러 리스트'를 빚어냈듯이 1994년 르완다의 비극이 이 책을 만들었다. 당시 스물 두살 여대생이던 임마꿀레가 겪은 실화다.

94년 내전으로 르완다에서는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종족이 다르다는 게 이유였다. 옛 르완다는 다수 종족인 후투족과 소수종족인 투치족이 평화롭게 살던 나라였다. 하지만 르완다를 식민지로 만든 벨기에가 두 종족을 갈라놓으며 차별정책을 펴는 바람에 두 종족 사이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이 깊어졌다.

악몽의 대학살이 시작되면서 투치족인 임마꿀레 가족은 위험에 처한다. 이웃과 친구가 목숨을 위협하는 적으로 돌변했다. 임마꿀레는 가로.세로 각각 1미터 정도의 작은 화장실에서 일곱명의 다른 투치족 여성들과 91일 동안 숨어지낸다. 눕기는커녕 포개 앉기에도 빠듯한 공간. 공포의 시간을 이겨낸 뒤 임마꿀레가 들은 소식은 부모님과 오빠.남동생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임마꿀레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건 좁은 공간에 잘 숨어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극한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고, 또 가족을 죽인 원수를 용서해서다. '믿음과 희망을 잃어버리면 남는 건 죽음뿐이다.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임마꿀레는 화장실 안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일분 일초를 아껴 밤에는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살아 집으로 돌아간 임마꿀레는 오빠의 시신을 수습한다. 목과 사지가 다 잘린 상태. 숨막히는 슬픔과 분노가 가슴을 옥죄어왔다. 임마꿀레가 다시 평안을 찾는 데는 종교의 힘이 컸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용서로 증오의 사슬을 끊기로 했다. 가족을 죽인 살인자를 만나서도 "당신을 용서할게요"란 한 마디만 했다.

임마꿀레는 현재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일하고 있다. 화장실에서 공부했던 영어가 새출발의 씨앗이 됐다. 누구에게나 절망과 분노의 순간이 있겠지만, 어디 임마꿀레만 하랴. 그의 삶이 주는 가르침이 참 고맙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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