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6)-제88화 형장의 빛|수인 박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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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사형수 양정수가 무기로 감형된것은 78년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를 박정희대통령이 읽고 양의 노모정성에 크게 감동하여 9대 대통령취임 특사로 감형시킨 것이었다.
양의 구명운동을 했던 나로서는 한 귀한 생명을 건져준 대통령의 은혜를 간직하고 있던 차에 박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35) 가 91년3월하순 향정신성 의약품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된 일이 있었다. 부모가 모두 갑작스럽게 흉탄에 유명을 달리하자 원체 내성적이었던 박씨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89년에도 마약법위반혐의로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바 있었다.
4월10일 오전 박씨가 수감된 수원교도소를 찾았다. 박대통령으로 부터 받은 은혜를 그의 아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서 였다. 양정수와 그의 노모의 얘기가 실린 신문을 복사해 들고갔다.
수원교도소장 이순일씨는 안면이 있는 분이라 반갑게 인사했다. 보안과장에게 연락해 특별면회를 신청했으나 본인이 극구 면회를 거절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심경이 괴로위 그랬거니 생각했다. 자신의 누나 근혜·근영씨 이외에는 누구도 면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보안과장을 통해 나는「스님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당신 아버지의 은혜를 입은 바 있어 인사하러 온 것」 이라는 내 뜻을 전하고 양정수 노모의 기사가 실린 복사물을 넣어주었다. 잠시후 면회에 응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교무과가 교화의 주무부서이나 중요인물은 보안과에서 관리하고 있다.
보안과장실에 앉아 있으니 박씨가 들어왔다. 흰색 영치복 차림의 박씨는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고 예의도 깍듯했다.
우선 찾아온 목적을 얘기하고 사형수였던 양의 노모의 「모정승리」얘기를 길게하자 박씨의 눈자위가 차츰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마구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68년 여름 육영수여사가 내가 있던 도선사에 오셨을 때 멀리서나마 어린 지만군의 손을 잡고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자비심이 많았던 육여사는 청담스님을 뵈러 도선사에 자주 왔었다. 가끔 나는 소록도에 갔었는데 지금도 그곳 나환자들은 육여사가 지어준「나환자 맹인사동」을 자랑하면서 자신들 손을 덥석 잡아준 육여사를 잊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 육여사 아들이 마약으로 체형을 받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얘기하자 육여사를 추모하는 대목에서는 큰소리를 내며 흐느껴 울었다.
감옥이야말로 새로운 인생을 츨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얘기하면서 과거의 지만을 죽이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리고『당신은 정신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두시간동안 얘기하면서 하루빨리 세속적인 번뇌와 방황의 늪에서 벗어나 밝고 건강한 생활인으로 복귀하라는 내말을 흐느낌 속에 진지하게 듣던 박씨는『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체중도 늘어 건강도 회복하고 있습니다. 나가게 되면 꼭 앞으로 살아갈 문제를 상의드리겠습니다.』면서 눈물을 그쳤다.
아마 그 평생 이렇게 많이 운적은 없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깊이 흐느껴 우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많이 참회하고 있다고 느꼈다.
박씨를 만나고 난후 수원지방법원을 방문해 관대한 처분을 내려줄것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츨했다.
5개월후 박씨는 공주치료감호소에서 감호처분을 받고 석방되어 건강한 시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열심히 살아 부모님 은혜를 갚겠다』는 그는 포철 방계회사인 제조업체 삼양산업을 이끌면서 이제 사업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내가 주지로 있는 자비사에는 박대통령과 육여사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다. 항상 영정을 대하면서 미안한 감정이 있었는데 박씨를 만난이후에는 한 사형수를 살려준 박대통령의 은혜에 10분의1은 갚은것같아 짐을 조금은 벗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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