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물어야 하는 까닭/정규웅(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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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0년대 초반 영화배우며 가수였던 나애심씨가 불러 널리 유행됐던 노래로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것이 있다. 어둡고 괴로운 세월을 보낸 한 여인이 새 삶을 찾은 뒤 「한많고 설움 많은 과거일랑 묻지 말아 달라」고 애소하는 가사에 나씨 특유의 저음이 한껏 분위기를 살린 노래다.
○감춰두려면 더욱 생생
이런 저런 과거를 가진 여성들에게야 마치 자기 신세를 대변해주는 노래로 공감을 주었겠지만 남성들에게까지 즐겨 불렸던 까닭은 괴롭고 쓰라린 과거사는 가급적 들추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민족 특유의 한가닥 정서가 이 노래의 전체적 분위기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온갖 과거사들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 과거사 가운데는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길이 간직하고픈 것들도 있겠지만 부끄럽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때없이 괴롭히는 것들도 있다. 그 고통스러운 과거사들은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속성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쓰라린 과거라면 자신의 과거는 더 말할 것도 없고,남들의 과거조차도 가능한한 들추지 않고 덮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민족성의 한 장점이기도 한 용서와 화해정신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한때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 갱생하거나,영화를 누렸던 사람이 몰락하게 되면 그 과거를 개의치 않고 위로하며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 우리 민족의 착한 심성이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의 주가가 한창 치솟던 60년대초 경무대를 떠나던 이승만박사를 눈물로 전송했던 서울시민들의 심성,10·26사태이후 그래도 박정희대통령을 향해 애틋한 추모의 정을 표했던 많은 국민들의 심성,그리고 6공화국 출범이후 백담사에 은거하다가 급기야 청문회의 증언대에 오른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던 적지 않은 국민들의 심성…. 이런 것들이 우리 국민 특유의 착하고 따뜻한 심성을 그대로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그들 전직대통령을 향해 그같은 동정,혹은 연민의 눈길을 보낸 것은 그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해서도 아니고,잘못으로 얼룩진 그들의 과거가 파묻혔기 때문도 아니라는 점이 간과돼서는 안된다. 국민들이 한결같이 그들의 잘못을 심중에 간직하고 있음에도 그 잘못들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채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났다면 국민들은 오히려 냉담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국민들의 착한 심성은 그들의 드러난 잘못들을 감싸주고 덮어주려는데서 비롯한 것이다.
○개인이 용서할 수 있나
드러나지 않거나 파묻혀버린 잘못들이 용서나 화해의 대상이 되지 못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은폐되면 될수록 용서는 커녕 국민의 심중에만 있는 그들의 잘못된 과거는 그들의 부도덕성에 대한 적개심만 눈덩이처럼 커지게 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잘못된 과거란 감춰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오히려 공개됨으로써 떳떳하고 편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선거에 나설 예정인 김대중민주당대표는 최근 『집권하게 되면 정치인·경제인을 막론하고 그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거나,어떤 방법으로 지위를 차지했거나 일체의 과거를 불문에 부치겠다』는 내용의 발언을 해 주목을 끌었다. 어찌보면 집권을 겨냥하여 대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표방한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곰곰 따져보면 그 발언에는 신중성이 결여된 측면을 쉽사리 간파하게 된다.
그 발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정치인·경제인이 지난날 어떤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집권자의 의도 하나만으로 간단하게 덮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선 문제다. 집권자가 진정 대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발휘하여 잘못된 과거를 청산코자 한다면 그 잘못들을 하나하나 들춰내 국민들로 하여금 감싸주고 덮어주려는 마음이 스스로 일도록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또 하나의 문제는 만약 앞으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난 정권하에서의 모든 과오를 불문에 부치겠다』고 공약하고 집권후 그것을 실천한다면 「잘못된 과거」의 악순환은 되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불문에 부치면 악순환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국민이 은폐된 과거,감춰진 잘못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라도 결코 착한 심성으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국민이 용서하지 않는 잘못된 과거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이만 저만한 착각이 아니다. 잘못된 과거를 가진 사람은 과연 국민은 염두에 두지 않고 대통령만을 향해 「과거를 묻지말라」고 애소해야 할 것인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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