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기지수'를 아십니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13년 준공 예정인 107층짜리 부산 롯데월드.

전세계적으로 초고층 빌딩 건설 붐이 일면서, 마천루와 거품 경제의 상관 관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경제의 거품에 비례해 초고층 빌딩을 짓고자 하는 욕구도 커진다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견해다. 특히 초고층 빌딩을 짓는 지역에서는 거품 붕괴와 같은 경제적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도 크다고 여겨져왔다. 건물높이에 따른 이런 현상을 희화화한 것이 바로 '발기 지수'(erection index)다. 공식 경제용어라기보다는 속어에 가까운 이 말은 1920년대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맨 먼저 쓰이기 시작했다.

당시 이곳에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크라이슬러 빌딩 등 초고층 빌딩이 앞다투어 들어서고 있었다. 1930년 세계 최고 높이(319m)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됐으나, 이듬해 그 영예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넘겨줘야 했다. 이 빌딩은 102층에 높이가 381m에 달했다. 당시 건축주인 라스콥은 "이 건물은 인간이 걸어서 하늘에 이를 수 있는 땅을 상징한다"고까지 선언했다. 이 때가 바로 사상 유례없는 대공황이 미국을 덮치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경제 전문가들이 최고층 건물 건설 경쟁을 빗대 '발기 지수'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최고(最高)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아냥거리는 용어인 셈이다.

그후 이 지수가 거품 경제 붕괴를 예측하는 데 유용한 지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대표적인 것이 동아시아를 덮친 외환 위기. 당시 이 지역에는 초고층 빌딩 건설 붐이 한창이었다. 1997년 쿠알라룸푸르에 페트로나워스 타워(할리우드 영화 '인트랩먼트'의 배경이 된 쌍둥이 빌딩)라는 세계 최고층 건물을 지은 말레이시아는 외환 위기의 진원지가 됐다. 1970년대 미국 경제의 불황 직전에도 미국 전역에서 세계 최고층 빌딩 건설 경쟁이 격화됐다. 당시 지어진 건물들이 시카고의 시어즈와 뉴욕의 국제무역센터 빌딩이었다.

최근에도 전세계적으로 초고층 빌딩 건설 경쟁은 치열하다. 인류가 지난 80여 년간 세운 초고층 빌딩은 모두 33개. 그러나 이미 건설 중이거나 건설 예정인 초고층 빌딩만 무려 42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15개가 중동의 금융 허브로 떠오른 두바이에 들어선다. 미국에서도 5개가 건설될 예정이다. 초고층 빌딩이 건설되는 도시들은 한결같이 돈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 세계 최고층 건물은 대만의 타이베이 101 빌딩(높이 500m). 그러나 이 빌딩은 조만간 선두 자리를 두바이의 버즈두바이에 내줘야 한다. 조만간 완공될 이 빌딩의 높이는 무려 795m. 당분간은 경쟁자 없는 세계 최고층 빌딩으로 우뚝 설 전망이다.

한국도 이미 초고층 빌딩 건설 경쟁에 뛰어 들어섰다. 서울과 인천, 부산에서 잇달아 초고층 빌딩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특히 서울은 이 가운데 이미 4개를 승인했다. 비록 숫자화할 수는 없지만 한국도 '발기지수'가 극히 높아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뉴욕타임스가 이와 관련해 내린 분석이 결코 달갑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이 신문은 27일자 기사에서 한국의 초고층 빌딩 건설 열기를 두고 "선진국 진입에 대한 열망과 아시아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겠다는 경쟁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여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