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0)제88화형장의 빛(25)어느 출소자의 비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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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김무한(당시 55세)-.
그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불행한 사람중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를 만난 것은 82년 가을 내가 그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부터 였다.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진실 된 삶을 살고자 부처님께 귀의했다』 고 시작된 김무한의 편지에는77년 내가 대구교도소에서 금강경을 강의할 때「앞에 나와 칠판에 원문을 적던 무기수」였다는 자기소개가 덧붙여져 있었다.
그는 살인죄로 17년을 감옥에서 살았는데 이제 가출옥하게 되었으니 신원보증을 서주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고 부탁해왔다.
아무도 신병을 인도할 사람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보증을 서주었다.
그는 순한 양 같은 사람이었다.
17년 만에 가석방되어 내가 주지로 있는 태릉 자비 원에 와서 잠시 살았다. 과거 내가 가르치던『금강경강의서』를 품에 안고 온 덕분에『금강경강의서』교정판을 새로 낼 수 있었다.
그는 절에 있으면서 사소한 일거리들을 알아서 처리했다. 그리고 잠시도 육체를 편히 두지 않았다. 그러한 노고에 신도들이 돈을 모아서 주면『나는 죄가 많아 돈 받을 만큼 떳떳 지 못합니다』하며 끝내 거절하곤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는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부처님 도량에서 생긴 돈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무한은 예쁜 색시를 만나 결혼해 살림을 차리고 살아보는 것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소박한 미래를 위해 교도소에서 피땀을 흘리며 구두수선을 배웠고 알뜰하게 돈을 저축했다. 그가 짊어진 삶의 보따리는 무겁고 힘겨울지라도 자기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착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사고가 발생했다. 시주나 불공 때 부처님께 공양하던 불전 통이 저녁마다 깨져 누군가가 돈을 꺼내 가는 것이었다. 그때 내 절에는 김무한말고 출소자가 2명 더 있었다. 처음에는 모른 체 해주던 김무한은 어느 날 조용히 날 찾아와 돈을 꺼내 가는 사람을 보았다고 얘기했다. 돈을 훔친 자는 나이 어린 청년이었다.
그 청년과 다른 출소자는 함께 술을 먹고 김무한을 산으로 데리고가 배신자라며 폭행해 팔을 부러뜨렸다. 그는 참고 또 참았다. 심하게 당한 후 나에게 찾아와『스님 내가 남아있으면 저들에게 악심만 안겨줄 것 같습니다』며 떠나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소개로 그는 부산 바닷가 근처 용궁 사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돼지를 키우면서 살림을 차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인간다운 진실 된 삶을 살기 위해 그는 한 가정을 이뤄 행복하게 살겠다는 작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돈을 모았다. 그러나 행복의 문턱은 높고 아득하기만 한 것인가.
김무한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죽기 전 한 착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약속하고 행복의 문턱에 가까이 서있던 그였기 때문에 애처로움은 한이 없었다.
그토록 소원이던 한 여자와 가정을 이루려던 그의 외로운 영혼을 왜 데려갔을까. 나는「부처님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에 신앙심이 흔들릴 정도였다.
나는 그의 슬픈 영혼을 위해 49재를 준비했다. 그의 영혼을 달래고 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나의 정성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있다.
남을 위하여 자기성찰과 반성으로 살았던 김무한. 범인이 보기에는 애틋한 삶이었으나 그는 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오히려 달게 즐겼는지도 모른다. 지은 죄의 허물을 벗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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