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한 내용엔 "시간 없다" 질문 안 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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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질문도 안 했는데 끝내면 어떻게 합니까."(기자)

"타 부처가 기다리고 있어서…."(공무원)

지난달 26일 오전 11시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5층 합동브리핑실. 교육인적자원부 김정기 평생학습국장은 학점은행제에 대한 설명을 한 뒤 기자 세 명의 질문만 받고 브리핑을 끝냈다. 내용이 복잡해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11시부터 브리핑을 할 예정이던 여성가족부 공무원들이 "빨리 끝내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정부 중앙청사에는 이런 일이 수시로 발생한다. 교육부.행정자치부.여성가족부.통일부 등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5층 브리핑실은 두 개다. 하지만 긴급 브리핑이나 수시 설명회가 겹칠 때는 '방'을 놓고 부처 간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노무현 정부가 정부 중앙청사에 합동브리핑실과 기사송고실 운영을 시작한 것은 2003년 9월 1일. 부처별 기자실이 없어지고 공동 기사송고실로 바뀐 것이 기자나 공무원 모두 불만스럽다. 특히 브리핑 내용이 부실해져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사례도 속속 발생하고 있다. 브리핑실과 기사송고실이 통폐합되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 짜깁기 브리핑에 불리할 땐 입 닫아=매주 목요일은 재경부의 공식 브리핑이 있는 날이다. 브리핑제를 도입한 지 4년 가까이 됐지만 이 공식 브리핑에 기대를 거는 기자는 거의 없다. 한 주간 나왔던 보도자료를 짜깁기해서 정리한 것을 다시 반복하는 정도여서다. 기자들 사이에서 "들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대신 해명 자료 만들기에는 열심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언론에 예민한 보도가 나오면 해명 자료 만들기 바쁘다"고 말했다. 보도 내용이 다 맞다고 해도 오보로 몰고가 일단 해명 자료를 내고 국정 브리핑에 올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2일 국방부는 KF-16 전투기 정비지원 체계에 관한 감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브리핑은 발표할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갑자기 취소됐다. 대당 수백억원 나가는 KF-16의 추락 이유가 '정비 불량'으로 밝혀졌는데 감사 결과가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방부는 현재도 감사 결과와 후속 대책에 대해서는 브리핑 계획이 없는 상태다.

보건복지부는 2일 미국 간호사 시험(NCLEX-RN)의 건전한 정착을 위해 감시 활동을 벌이겠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복지부는 자료에서 "대한간호사협회와 함께 '건전한 시험문화 조성! 국제적 대외 이미지 제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체 감시 활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막상 수험생들에게 한국 시험이 중단(16일)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통보받은 바 없다"고 발뺌했다. 국내 시험이 아니기 때문에 감시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외국어대 김춘식(신문방송학) 교수는 "정부가 부처별 홍보자료 실적을 평가하다 보니 질 낮은 면피용 자료를 내기에 급급한 현상이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 공무원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정부는 청와대가 개방형 브리핑제의 성공적인 정착 사례라고 꼽았다. 그래서 청와대는 현행 시스템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현재 청와대 출입기자로 등록된 인원은 122개사 198명. 기자들은 비서들이 근무하는 건물에는 출입할 수 없다. 비서동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숨은 얘기를 취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필요한 경우 전화 취재만 허용돼 있다. 그러나 전화 취재에 응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취재원에 달려 있다.

일반 부처도 다르지 않다. 환경부는 별도 기자실이 있을 때는 수시로 브리핑이 이뤄졌다. 중요 사안인 경우 한 시간 이상 질문이 이어지곤 했다. 지금은 매주 월요일 오전 11시에 세 가지 이상의 보도자료를 모아서 브리핑한다. 주제별로 5~20분이 할애된다. 질문이 쏟아지더라도 점심시간을 넘기면 끊길 때가 많다.

환경부 고위 관계자는 "8월부터는 기자들이 상주하지 못해 짧은 시간 안에 기자들의 개별 전화 취재에 담당자가 일일이 답변해야 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양영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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