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푸른 솔이길 꿈꾼 노동자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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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인 박영근(1958~2006)이 세상을 놓은 지 1년이 됐다. 1주기를 맞았다고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창비)가 나온 걸 보고 알았다. 늘 이 모양이다. 세월은, 횟수를 늘리며 윤회하는 추모일 앞에서야 제 빠르기를 드러낸다.

박영근은 별안간 죽었다. 생전의 박영근과 그토록 술을 마셔댔던 어느 누구도 박영근이 그렇게 가버릴지 알지 못했다. 2006년 5월 11일 강남성모병원 영안실에서 몇몇이 울분을 터뜨리고 소리를 질렀던 건 취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속으로나마 박영근을 보낼 채비를 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인과 동갑내기인 이재무 시인이 "그의 죽음은 일종의 '소극적 자살'인 측면이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고, 주위의 문상객들도 하나 둘 고개를 끄덕였다. 소극적 자살이라….

그는 결행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죽었다. 빈소에 앉아있던 문인 중에서 이 복잡한 병명을 이해하는 자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알고 있었다. 박영근은 끝까지 술을 마셨다. 병든 몸속으로 그는 부지런히 술을 들이부었다. 그는 굳이 목을 매지 않았다. 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만 퍼마셨다. 그 적극적 행동을, 고인을 애도하러 모인 시인들은 '소극적 자살'이라고 이름붙였다.

'첫겨울의 숲에서 나무들은 지금/온몸 전부를 열어/몸속의 수분을 밖으로 내뿜고 있다/…/나무들은 물관의 길을 뚫고/가지 끝까지 흐르던 심장의 피돌기를 정지시키고/영하의 지상으로 자기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겨울, 나무' 부분, 문예지'작가들' 2005년 겨울호에 발표)

고인이 이승에서 보낸 마지막 겨울. 그는,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제 몸에서 수분을 빼내는, 하여 앙상하기를 스스로 작정한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진 '시작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요즘 나의 삶이 그렇고, 시(詩) 또한 그러하다. 때로 시라는 비유의 세계가 현실의 삶과 한 치의 틈도 없이 일치되어 나타나는 때가 찾아온다. 요즘 몸이 아프다.'

박영근의 죽음이 유독 안타까운 건, 그의 죽음이 한 시대의 퇴장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문학사 최초의 노동자 시인이었다. 1981년 등단해, 84년 첫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를 발표했다. 80년대를 민중문학의 시대라고 규정할 때, 박영근은 온몸으로 그 시절을 상징했다. 박영근은, 노동자의 몸으로 노동자의 삶을 쓴 시인이었다.

그렇다고 여느 노동시처럼 막무가내로 투쟁을 선동하지는 않았다. 시의 본령은 서정성이란 생각을, 박영근은 끝까지 붙들었다. 그의 시가 노래가 되어 오늘도 널리 불리는 건 바로 그 서정성 때문이다. 박영근은 '솔아 솔아 푸른 솔아'의 원작자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옳은 문학'이 '좋은 문학'이던 시절은 지나고 말았다. 변했다는 세상과 변하지 말아야 할 문학 사이에서 그는 헷갈렸고 어지러웠다. 시인은 오늘을 살고 있고, 그래서 오늘의 삶을 시로 쓴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과거형으로만 바라봤다.

'제발 80년대니 90년대니, 그런/헛소리로 나를 불러내지 말아요/나는 지금 2000년대의 근사한 헛소리를 씹고 있고/달콤한 똥을 싸고 있다구요'('낡은 집' 부분)

고인을 추억하는 일화 따위는 열거하지 않겠다. 전설처럼 부풀려지는 그 일화 안에서 박영근의 삶은, 한낱 지난날의 낭만에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박영근은 아직, 최후의 노동자 시인의 이름이 아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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