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깜짝 참석에 감사들 당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노무현 대통령이 21일 오후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열린 ‘공공기관 감사 공직기강 간담회’에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최근 외유 논란을 빚고 있는 남미 연수 추진 경위와 재발 방지 대책 등을 보고받았다. 오른쪽은 김우식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청와대사진기자단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대통령의 어조는 단호하고 싸늘했다. 찬바람이 느껴졌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못 냈다."

21일 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공공기관 감사 간담회의 분위기를 한 참석자는 이렇게 전했다.

형식은 간담회였으나 30여 분에 걸친 노 대통령의 질책과 당부가 이어졌다. 대통령은 시종 침통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간담회에 참석한 한 공기업 감사는 "대통령이 참여정부가 욕을 많이 먹었어도 버텨낸 건 도덕성과 정당성 때문이었는데 안타깝다고 한 부분에선 비장감까지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는 애초 장병완 기획예산처 장관이 주관하는 것으로 돼있었다. 예산처의 소수 핵심 관계자만 대통령의 참석 사실을 눈치챘을 뿐이다. 오후 2시쯤 느닷없이 청와대 경호원들이 정부중앙청사로 들이닥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경호원들은 외교부에 마련된 기자실에도 들어와 한 사람씩 신분증을 확인했다. 세종로 청사 출입증이 없는 기자와 카메라기자는 청사 밖으로 퇴장됐다. 이 과정에서 취재진과 경호원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대통령의 참석 사실이 퍼지자 일순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권오규 경제부총리와 장병완 예산처 장관은 물론 청와대 참모진이 총출동한 데다 경호요원까지 배치되자 감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한 참석자는 "예산처에서 오라기에 별 생각없이 갔다가 대통령이 입장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청와대가 이번 사안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들어서자 이번에 출장 갔던 감사들이 적잖이 당황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장병완 예산처 장관의 조사 결과 발표 직후 시작됐다. 노 대통령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단호했다. 이번 출장에 대한 질책이 상당 시간 이어졌다.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졌다 해서 모두 정당화될 수 없다는 부분을 몇 차례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의 눈높이가 달라졌으니 감사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처신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회의 직후 청와대 측은 간담회에서 나온 대통령의 발언은 물론 분위기조차 언론에 전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렸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간담회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했는지 숨소리도 안 날 지경이었다"며 "청와대의 함구령이 워낙 엄해 지금으로선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간담회 후 '출장'을 갔던 감사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는 모습도 보였다. 대통령이 이날 예산처의 제도개선책에 대해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선을 그어 처벌 수위가 더 높아지지 않을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경민.윤창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