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기평 수사 '릴레이 압력'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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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김영주 산업자원부 장관이 산자부 공무원과 산하기관의 비리 수사와 관련해 이택순 경찰청장에게 '압력성' 전화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 장관의 전화를 받은 이 청장은 직후 관련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강남경찰서장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강남경찰서는 산자부 공무원들이 한국산업기술평가원(산기평) 임직원에게서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을 수사 중이다.

이 청장은 21일 "(김 장관이 최근 전화를 해와) 산하기관이 정부 부처에 밥을 사는 것은 대가성이 명확하지 않은데 정부기관과 산하기관 간 시끄러운 문제로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김 장관이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일할 당시(2004년 5월~2006년 3월) 이 청장은 대통령비서실 치안비서관(2004년 8월~2005년 1월)으로 함께 근무했다.

◆ "경찰청장에게 혼났다"=정수일 강남경찰서장은 이날 오전 7시쯤 일부 기자들과 아침 식사를 함께 했다. 정 서장은 산기평 임직원들에 대한 수사 상황을 묻자 "(이택순 ) 청장이 (산자부) 장관을 어디서 만나 항의를 들었나 보다"라며 "청장으로부터 (전화로) 직접 혼났다"고 털어놨다.

정 서장에 따르면 이 청장이 최근 "(산하기관 직원들이 산자부 공무원에게 낸) 밥값 정도를 수사해서 언론에 보도되게 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 청장이) 당신(서장)도 누구와 밥 먹을 땐 밥값을 낸 적 있지 않느냐"라는 질책 내용도 전했다.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열 받았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 계속 바뀌는 관련자 해명=정 서장은 오후 "청장으로부터 사건과 관련해 전화 받은 적이 없다"며 "19일 서울 장충동에서 열린 김도식 경남지방경찰청장의 딸 결혼식에서 (이 청장에게) 들은 얘기"라고 말을 바꿨다. 결혼식에서 인사를 하자 이 청장이 "너, 밥값 수사 한다며"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또 "그런 거까지 수사하면 뭐든지 수사해야겠다"는 말도 했다고 정 서장은 전했다. 그는 그러나 "청장이 산자부 장관과 통화했는지는 순전히 내 추측"이라고 부인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청은 곧바로 보도자료를 냈다. "(이 청장이) 결혼식장에서 인사하는 정 서장에게 '공무원을 상대로 밥값을 대신 내준 사안을 수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하라'고 한 사실이 있다"고 해명했다.

이어 이 청장은 오후 4시50분쯤 기자실을 찾아와 김 장관과 통화한 사실을 시인했다. 이 청장은 "두 번 전화가 왔다는 메모가 있어 내가 전화를 했다"며 김 장관으로부터 청탁성 전화가 왔던 사실을 공개했다. 하지만 강남서장에게 전화한 사실은 부인했다.

산자부 측도 처음에는 "장관이 회의에 들어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전화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이 청장의 해명이 알려진 뒤 "전화한 사실은 있다"고 말을 바꿨다.

◆ 산기평 수사는=강남경찰서는 4월 초 산기평이 산자부로부터 연구용역을 따내기 위해 산자부 공무원들에게 수억원대의 금품과 향응을 제공했다는 첩보를 입수해 수사에 나섰다. 이어 이달 10일께 산기평 직원들이 정부과천청사 주변 식당에서 산자부 공무원들의 회식 비용 400여만원을 대신 갚은 혐의를 확인하고 산기평 간부 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현재 수사를 계속 진행 중이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이 지지부진한 상태다.

천인성 기자

◆ 한국산업기술평가원(산기평)=산자부가 각 기업.연구소.대학에 제공하는 연구사업에 대해 평가를 맡는 산자부 산하기관이다. 산자부가 발주하는 국가연구개발 사업 예산(연 약 2조원 규모)을 관리.집행한다. 현재 임직원은 160여 명. 서울동부지검도 최근 국가청렴위에 접수된 제보에 따라 산기평 연구지원비와 관련한 수사를 벌이고 있다.

산기평 수사 일지

-2006년 10월=국회 국정 감사, "산기평 직원의 법인카드 내역 중 산자부가 있는 과천 식당에서 결제한 게 많다" 며 의혹 제기

-2007년 4월 9일=강남서, 산기평에서 법인카드로 산자부 공무원의 외상 밥값을 대납하고, 수억원대 뇌물 공여했다는 첩보 입수

-4월 13일=강남서, 서울경찰청에 내사 착수 보고

-4월 25일=강남서, 산기평 압수수색/2001~2006년 판공비 및 법인카드 사용 내역 확보

-5월 중순=강남서, 산기평 간부 2명 불구속 입건/네댓 차례에 걸쳐 400여만원 대납 혐의

- 5월 하순(?)

.김영주 산자부 장관, 이택순 경찰청장에게 "정부 기관과 산하 기관 간 시끄러운 문제로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전화

.이 경찰청장, 정수일 강남서장에게 "그런 거까지 수사하면 뭐든지 다 수사해야겠다"며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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