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황세희의몸&마음] 자녀를 품 안에서 내보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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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얼마 전 성공한 직장인 K씨(53)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며 상담을 요청했다. 나는 '가족 중에 중병 환자가 생겼나 보다'고 생각하며 그를 맞았다. 하지만 그의 걱정거리는 아들의 진로였다.

그는 대뜸 "의대 졸업반 아들의 전공 선택을 위해 여러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다닌다"며 어떤 과를 보내야 좋을지 물어봤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의사로서 평생 걸어갈 길인 전공은 당연히 본인의 적성과 선호도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들이 무슨 과를 원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K씨는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정신과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그 아이가 뭘 알겠어요? 내가 알아보고 정해 줘야지!"라며 단호하게 말하는게 아닌가.

25세 아들이 6년간 공부하면서 마음에 둔 전공을 일언지하에 무시하는 K씨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사실 그는 의대를 졸업한 것도, 의료계에 종사한 적도 없다. 의사의 길에 대해선 당연히 아들보다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K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수들을 만나면 대학생 자녀의 수강 신청, 결석 사유, 진로 상담 등을 위해 교수를 찾는 학부모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번 달 내내 세간의 관심을 끈 최대 뉴스 역시 술집에서 맞고 들어온 대학생 아들을 대신해 보복 폭행을 하다 구속된 재벌 총수 이야기다. 심지어 이 사건에 대해 법무부 장관은 강연회에서 "부정(父情)은 기특하다,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마저 피력했다.

매사를 부모의 보호막 아래서 보내려는 성인 자녀와 자식을 계속 품안에 두고픈 부모의 태도,무엇이 문제일까.

법적으로 만20세가 되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성인이 된다. 독립된 성인은 경제적 자립을 전제로 하는데 사춘기 때부터 농사일을 돕던 시절엔 가능했다. 하지만 경제발전.고학력화.저출산화 등이 겹친 21세기 한국 사회에선 몸은 어른, 정신적.사회적 수준은 미성년 상태인 불완전한 성인이 양산되고 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책임한 태도'다. 자신의 일도 나 몰라라 하며 힘든 일은 무조건 기피한다. 마음속엔 보호 받을 생각뿐이다. 이 상태가 심해지면 영원한 어린이로 남고픈 '피터팬 신드롬', 부모 품에서 끝까지 안주하려는 '캥거루족', 혹은 사회와 고립된 채 집안에서만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 등 병적인 사회 부적응자가 탄생한다.

이런 성인 자녀를 둔 부모의 정신건강 역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부모 자신의 삶에서 독립된 영역이 없을 땐 자녀가 독립해 자신의 둥지를 떠나는 것이 불안하다. 이런 분리불안(separation anxiety)을 줄이기 위해 자녀를 과잉보호 하다 결국 '어른 아이'를 조장하게 된다. 또 의존적인 자녀를 끊임없이 돌봄으로써 부모 자신의 마음속 열등감을 떨쳐 버리고 싶은 무의식도 작용할 수 있다.

진정 자녀가 독립된 성인으로 자라길 원하는 부모라면 어릴 때부터 적절한 역할을 부여하고 책임있는 행동을 하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아이의 시행착오는 인내심으로 지켜보자. 과잉보호와 지나친 간섭, 혹은 방임(neglect)은 물론 삼가야 한다.

오늘은 성년의 날이다. 이제껏 소홀했다면 오늘부터라도 한 달에 한 가지씩 자녀의 수준에 맞는 자율권을 부여해 자녀의 정신세계를 건강하게 키워 보자.

황세희 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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