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만들기(유승삼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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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문화의 알맹이를 이루는 것의 하나가 익살이다. 영화를 보아도,삶과 죽음이 갈리는 긴박한 전투장면에서도 그들은 곧잘 익살맞은 대호 한두마디를 잊지 않고 곁들인다.
그런 그들이 정치마당이라고 해서 익살을 빼놓을리 없다. 지난 16일에 있었던 민주당 대회에서도 예외없이 그 미국적 익살이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클린턴이 감동적인 후보지명 수락연설을 하기에 앞서 등장한 사람은 코미디언 체비 체이스였다. 그는 이렇게 익살을 부렸다.
○부러운 미국선거전
『페로는 떨어져 나갔다. 하나가 쓰러졌으니 이제 다음차례는 하나반이다.』
하나반이란 부시대통령과 퀘일부통령을 합친 숫자임은 물론이다. 코미디언이 조성해 놓은 폭소와 환호의 무드속에 마침내 클린턴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그 환호와 열광의 분위기를 이번에는 가슴을 흔드는 감동으로 바꿔놓는다. 『국민은 변화를 원한다. 그러나 현 정부가 그 방해가 되고있다. 당신이 당신의 힘을 국민을 돕는데 쓰지 않으려면 옆으로 비켜나라. 내가 그것을 하겠다…. 그동안은 미국이 세계를 변화시켜 왔으나 이제는 우리 모두가 미국을 변화시켜야할 시점이다.』
아주 잘 짜인 식전시나리오였다. 연설의 수사들도 멋이 넘친 것이었다. 후보지명 과정도 이쯤은 돼야 흔히 말하듯 「선거는 축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당의 후보지명 광경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들어져 보여도 우리가 꼭 그를 따라야 한다는 법은 물론 없다. 형식은 아무래도 좋다. 미국 전당대회의 풍경쯤은 천박하다고 외면해버려도 그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꼭 본받아야 할 것이 적어도 한가지는 있다. 그것은 전당대회가 후보지명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집권시의 국가경영 청사진을 확정해 국민 앞에 제시하는 대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국민들에게 충분한 판단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전당대회 이후 클린턴의 급격한 인기상승이 단지 그가 한 연설의 화려한 수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민주당은 후보지명과 동시에 승리할 경우 집권 4년간에 펼칠 대내외 정책의 기조인 정강정책을 조목조목 명확하고 상세히 천명했다. 그것이 미국 국민들에게 좋은 판단의 자료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전당대회부터 큰차
또 그것은 앞으로 있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공화당이 채택할 정강정책과 비교되면서 선거는 자연스럽게 정채대결로 점화되어 갈 것이다.
반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어쩐 일인지 후보지명 대회는 지명 그 자체로 끝나버린다. 그나마 그 지명도 일반 국민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소수에 직업적 정치꾼들 사이에서의 요무절차일 뿐이다.
그래서 요즘 대선후보들이 저마다 이 단체 저 단체,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분주히 얼굴을 내밀며 다투어 사전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국민들은 도무지 그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 알지못한다. 그저 듣느니 입발린 소리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더욱 더 불안해진다.
우리들의 눈과 귀가 정보사땅 사건으로 온통 가려지고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 역시 대선책략에만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도 세계는 격동의 흐름을 계속해왔다. 우리 주변의 상황만 살펴보아도 우리 정부가 미국의 핵정책에 휘말려 우라늄 농축시설이나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갖지않기로 일방적으로 선언한 뒷구속에서 일본은 플루토늄의 대량도입을 추진하는데 이어 세계 최대의 핵재처리시설의 건설까지 계획하는 등 태연히 제실속을 차려왔다. 또 미일은 대북한 관계개선을 남북한간의 대화진전에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비공식 관계개선과 진출은 제나름대로 깊숙한 수준까지 진행시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IBM·도시바·지멘스 등 세계 3대 컴퓨터사는 경쟁관계를 뛰어넘어 2백56메가비트의 슈퍼칩을 공동생산키로 합의했다. 이 몇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앞엔 정치적 파도도,경제적 파도도 높아만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대선후보들은 이런 국제환경의 변화들에 과연 어떻게 대응할 작정인지 그 누구도 뚜렷이 밝힌바가 없다. 아마도 과거에도 그랬듯이 선거가 임박해지면 우선 입에 달고 듣기 좋은 약속들을 자신부터도 제대로 알지못한채 봇물을 터뜨리듯 쏟아낼 것이다.
○채점표 만들어 심판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약속들의 허황함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런 이상 우리는 그들의 약속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 약속을 만들고 그것을 후보들로부터 다짐받아내야 한다. 각 시민단체가 나서서 각 후보에 대한 질문서를 만들고 그에 대한 답변을 들어 채점표를 만들자. 말하자면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자는 것이다. 미국 선거전을 부러워하고 있을 겨를도 없다. 대통령 만들기야말로 이 격동의 시대속에서도 선택기가 마땅찮은 시험에 나서야할 딱한 운명에 처한 우리들이 해야할 최소한의 몫일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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