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개혁(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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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5때 남한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화폐정책에 고심했었다. 처음에는 양쪽 화폐를 함께 쓰면서 단계적으로 북한 화폐로 대체해 가려 했으나 일반사회에서의 북한 화폐에 대한 보이지 않는 거부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당초의 계획을 바꾸었다. 그들은 조선은행을 통해 당시로서는 고액권인 1백원권 화폐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점령지역의 경제는 곧 큰 혼란에 빠졌으며,그들이 기대했던대로 그 혼란은 피난지에까지 파급됐다. 9·28수복후까지 소위 「48」넘버 화폐문제로 사회가 한동안 어수선했다.
피난정부는 대통령 긴급명령 제10호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발동하여 53년 1월16일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모든 조선은행권을 새로운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도록 조치했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제1차 통화개혁조치,즉 첫번째 화폐개혁이었다. 8·15해방이후 남북한은 똑같이 각각 세차례의 화폐개혁을 겪었다. 북한에서는 해방후에도 한동안 일제때의 화폐와 소련군표를 섞어 통용하다 47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새화폐를 발행,기존화폐와 1대 1로 교환하는 통화개혁을 단행했다. 구화폐 1백원을 새 화폐 1원으로 교환한 59년 2월의 조치가 두번째,자금사정을 완화하기 위한 79년 4월 1대 1의 새화폐 발행이 세번째 통화개혁이었다.
53년 2월 한국에서의 두번째 화폐개혁도 전후의 인플레가 원인이었고,1백대 1 교환이라는 점에서는 북한과 똑같았다. 화폐개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당시의 어린이들이 화폐가치가 갑자기 1백배로 늘어나는줄 알고 모아둔 돈을 감춰두고 있다고 못쓰게된 일이 많았던 것도 화폐개혁에 얽힌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5·16군사혁명이 이듬해인 62년 6월 10대 1의 새화폐를 발행한 것이 세번째 화폐개혁이었다. 북한의 네번째 화폐개혁조치는 유휴자금을 산업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두번째·세번째 화폐개혁과 그 배경이 많이 닮아 있다. 그러고보면 남북한의 화폐개혁은 직·간접으로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데,화폐개혁이 어떤 명분으로도 긍정적일 수만은 없는 것이고 보면 그것도 분단현실의 부작용 가운데 하나는 아닐는지 모르겠다.<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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