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이명박 - 박근혜 벼랑끝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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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선거에는 표차(票差)의 마력이 있다. 1%도 안 되는 표차가 나라의 운명과 세계의 진로를 바꾼다. 수십 표, 수백 표에 한없는 무게가 실리고 세상도 흔들린다. 그래서 경선 룰이 더욱 더 중요하다. 경선 룰은 칼날처럼 반듯해야 한다. 그래야 표차가 수십 표로 찌그러들어도 패자가 승복하고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 룰(rule)의 중요성… 이것이 이번 싸움의 교훈이다.

2000년 11월 8일, 아침 잠에서 깬 미국인들은 마술 같은 광경을 보았다. 대선의 운명을 쥐고 있는 플로리다에서 부시가 고어를 앞섰지만 표 차는 1764표. 주 전체 투표 590만여 표의 0.03%였다. 그러나 겨우 시작이었다. 재검표가 끝난 11월 10일, 표차는 327표까지 줄어들었다. 0.006%. 주 대법원은 수(手)검표를 결정했다. 고어 지지자 중엔 지식 수준이 낮은 이들이 부시 쪽보다 많았는데 적잖은 이가 투표용지에 구멍을 제대로 뚫지 않아 기계가 무효표로 처리했었다. 수검표를 하면 이런 표들이 살아나고 대통령은 고어에게 돌아갈 판이었다. 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5대 4로 수검표를 중단시켰다. 개표 논란으로 '국가가 갈라지는 것'을 우려해 연방의 권한으로 백악관을 부시에게 준 것이다.

0.006%라면 타조 몸통의 깃털 하나도 안 되는 무게다. 이 깃털이 부시를 백악관 담장 안으로 슬쩍 밀어넣었다. 이후 부시는 세계 곳곳에서 일방주의로 내달렸다. 미국이 드러나게 이스라엘 쪽으로 기울자 이슬람 원리주의는 부풀어 올랐고 9.11 테러가 터졌다. 부시는 클린턴의 대북한 포용정책도 뒤엎었다. 벼랑으로 몰린 북한은 핵보유국이 됐다. 미국 플로리다의 깃털 하나가 지구 반대편 한국인의 운명까지 바꿔 놓은 것이다. 깃털이 고어 쪽으로 날아갔더라면. 아마 세상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깃털은 한국 역사에서도 놀라운 일을 만들었다. 1997년 7월 21일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1차 투표. 이회창의 1등은 예상된 것이어서 오히려 관심은 2등이었다. 이인제.이한동.김덕룡.이수성의 4인 연대는 "1차 2등에게 2차에서 표를 몰아주자"고 해놓았다. 여차하면 2위가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는 판이었다. 결과는 2등 이인제 경기지사, 3등 이한동 의원이었다. 그런데 표차가 8표(0.06%)였다. 4인 연대가 흩어져 이 지사는 결선에서 40%에 그치긴 했지만 1차 2등은 그의 사고체계를 바꾸어놓았다.

이 지사는 자신을 '이회창 급'으로 생각했다. 그러곤 뛰쳐나가 신당을 만들고 대선에 나섰다. 만약 이한동 의원이 2등을 하고 이 지사가 3등을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이 지사는 결선 투표에 나가질 못해 대선에 출마할 동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한동 의원은 애당초 2등을 하더라도 당을 나갈 상황이 못 됐다. 이 지사를 유혹했던 것 같은 대중적 지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8표 때문에 이 지사는 들판으로 뛰쳐나갔고, 보기 좋게 여권표를 갈랐으며, DJ(김대중)의 승리를 결정적으로 도와주었다.

한나라당 경선은 일단 다시 궤도에 올랐다. 이제 3~4개월이면 승부가 난다. 깃털이 날지, 난다면 누구 쪽으로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깃털의 충격'을 녹일 틀이다. 경선은 칼날처럼 반듯해야 한다. 1표 차로 져도 승자의 손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 순간, 경선은 정치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