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교수노조, 낯 뜨겁지 않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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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왜 대학에 가려 하는가, 또는 보내려 하는가를 물어보면 학부모들 대부분이 망설이지 않고 "자식 잘되라고"라 대답한다. 헌법 제31조에서 보장하는 국민의 수학권 내지 학습권을 위해서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배우는 학생들의 권리이자 학부모들의 자녀교육권이지 선생들의 권리는 아니라고 해석한다. 교사의 교육권 내지 대학의 자율성은 그가 국공립학교 교원이면 공무담임권, 사립학교 교원이면 고용계약이나 직업의 자유에 근거하는 것이고, 이는 학생의 학습권을 상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교수노조가 학생들의 이런 학습권에 기여할 수 있는가. 최근 교육 관련 시민단체가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교수노조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긍정에 비해 세 배 정도 높았다. 당위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헌법 제22조 '학문의 자유'의 주체로서 교수노조 설립의 정당성이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의 자유는 대학교수만의 자유가 아니다. 학생과의 협력으로 실현되는 자유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의 노조 유사 조직인 조교단체, 복학생단체, 그리고 학부모단체 등의 결성도 부인할 수 없다. 학문공동체의 주도적 구성원인 교수의 가르치는 일을 이들 단체와 협상해 한다면 그건 이미 대학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교수 역시 강의의 대가로 임금을 받고 생활하는 근로자이기에 근로의 권리와 노동3권이라는 노동기본권을 정한 헌법 제33조에 의해 노조 설립이 부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헌재는 교원의 지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법률로 정하라는 헌법 제32조 제6항을 상위의 적용 조문으로 본다. 교원은 일반 노동자와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교수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인식과도 다르지 않다. 방학에도 봉급을 다 받는 대학 교수가 노동3권이 온전히 보장되는 노동자로 처우되기에는 어색하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헌재도 교수와 교사는 질적으로 다르다 했겠는가. 교사는 정치활동이나 노동운동을 못하게 하면서, 또는 교육위원을 겸직할 수 없게 하면서(그래서 교육위원의 일을 하려면 교사직을 사임케 하면서) 왜 교수에게는 허용하는가.

헌재는 교사가 가르치는 일만 하는 직업이지만, 교수는 그 외에도 연구와 사회봉사 등의 일을 한다 하여 이를 작은 중소기업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정부나 기업의 자문 등의 일을 하면서도 교수 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방학 때도 봉급을 받아 그런 경우가 없는 미국의 대학 교수보다 더 보장되고, 방학이 훨씬 짧고 잡다한 과업이 많은 일본 대학 교수보다 더 자유로운 것이 우리의 교수다. 미국에서 교수노조가 인정되는 것은 그런 특권을 없애고 난 순전한 노동자로서의 몫에 주어진 권리다.

교수가 일반 근로자에 비해 더 많이 누리는 혜택은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 위에 노동자가 받는 근로3권 역시 다 향유하겠다면 낯 뜨겁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이미 법외의 교수노조가 활동하고, 개정 사립학교법에 의해 대학평의회가 힘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이미 결성돼 있는 교수협의회 등이 만만치 않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교육도 이제는 세계 유수의 대학과 경쟁해야 살아남는 상황이다. 교수들은 교수노조 같은 한가한 얘기보다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양질의 교육을 서비스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학생들이나 자녀를 대학에 보낸 학부모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강경근 숭실대 법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