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지 안보이는 유가인상(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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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동안 관계부처간에 3개월에 걸쳐 지지부진하게 논의되어 왔던 유가조정문제가 매듭지어졌다. 25일부터 가격이 인상된 석유류제품 가운데 소비성 기름인 휘발유는 대폭 올리고,산업용 연료로 쓰이는 벙커C유 등의 인상률은 한자리수 이내로 조정됐다. 이번 유가인상은 국제 원유값 및 환율 상승과 석탄산업지원을 위한 재원확보 이외에도 국내 에너지 소비절약의 실효성을 확보한다는 등 여러 정책목표를 겨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유가정책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국민경제가 국내외 경제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장·단기 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급증하고 있는 에너지 소비는 우리나라의 에너지 해외 의존도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환경오염을 심화시키고 제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놀랄만큼 약화시켰다.
6공 정부는 출범이후 유가체계를 다분히 인기정책 수단으로 활용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연이어 여섯차례나 가격인하를 단행한 결과 선진국은 물론,일부 산유국에 비해서도 값싼 기름을 공급하게 됐으며 그것이 에너지 과소비의 한 주요 요인이 되었다. 장단기계획 없이 기름값을 뚝 떨어뜨렸다가 다시 대폭 올린다면 일상생활에서건,산업현장에서건 이에 적응해서 경쟁력을 갖추어가는데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정부의 유가정책은 늘 산업용 기름값 인상폭을 소폭 조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 결과 산업 부문에서 에너지의 합리적인 이용은 눈에 띄게 진전되지 않고 있으며,다소비와 과소비형 시설의 개체 작업도 늦어지고 있다.
전체 에너지의 거의 절반을 쓰는 산업부문이 에너지 절약형 산업구조로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상태에서 계속 싼값의 기름을 공급한다면 상대적으로 비싼 기름을 쓰는 일반 시민들에게 절약을 강조할 명분이 약해진다.
유가인상이후 물가동향이 올해 안정성장의 목을 조이게 될게 분명하다. 석유류를 원료로 하는 각종 공산품 가격이 들먹거리고 서비스요금까지 편승인상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당국의 강력한 행정지도가 요구된다. 하반기에는 철도·우편·전화 등 공공요금 인상이 예상되고 있고,대통령선거와 맞물려 각급 행정기관의 이완현상이 나타난다면 올해 소비자물가 8% 억제선은 무너지고 말 위험이 크다.
국제원유값이 오르면 국내 유가의 인상요인을 일부 흡수키로 한다는 취지로 조성된 석유사업기금의 용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국민들의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정유회사의 손실분을 보전하고 석탄산업을 지원하는 이외에 어째서 재정예탁금에 그 많은 돈이 계속 전용되고 있느냐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하고,이 제도의 보다 근본적인 개선문제가 공개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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