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한 진술강요 관행 “제동”|진술거부권 강조 판결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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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형사소송법상의 진술거부권 사전고지의무를 강조한 대법원 판결은 오랜 수사관행을 혁신하는 계기가 됨직한 「한국판 미란다」사건으로 평가된다.
비록 미란다 사건에서처럼 유·무죄의 판단이 바뀐 것은 아니나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을 알리지 않은 채 불리한 진술을 강요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자기부죄 거부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선언, 범죄 혐의를 인정한 공범피의자의 진술을 유죄증거로 삼은 원심을 뒤집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수사기관은 열악한 근무조건과 낙후된 장비 등을 이유로 적법수사 등 피의자 인권보호를 등한시해온 경우가 많았으며 국민들의 인권의식도 수사기관의 무리한 수사를 어느 정도 용인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최근 강제적인 임의동행 거부에 대한 공무집행방해혐의 적용에 무죄를 선고하고 48시간을 초과한 임의동행을 불법감금으로 규정하는 등 잇따라 형사소송법에 위반된 그릇된 수사관행에 제동을 걸어왔다.
대법원은 또 피의자의 불법적인 임의동행을 근절한다는 이유로 법무부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포함된 긴급 구속장제에 대해 『수사기관의 실질적인 구금·구속영장발부는 헌법상 영장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수사기관의 인권침해는 제도의 미비보다 정해진 적법수사의 틀을 지키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는 일관된 시각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번 판결은 사법경찰관의 피의자신문조서와 달리 피의자·피고인의 동의 없이도 증거능력을 갖는 검찰의 수사과정 녹화테이프 및 이를 토대로 한 피의자 신문조서에 준하는 검증조서에 대해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증거능력을 갖지 못한다』고 못박음으로써 적법수사정착이라는 사법부의 의지를 한층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형사소송절차의 준수를 앞세우는 미국의 경우 66년 소위 「미란다 대 애리조나 사건」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이후 피의자 연행 때 피의자에게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자신의 진술이 법정에서 불리한 증거로 채택될 수 있음 등을 사전에 알려주는 「미란다 경고」가 관행으로 정착됐다.
◇미란다 사건=63년 3월 31일 강간 등 혐의로 경찰에 구금된 「어니스트 미란다」라는 피의자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및 묵비권 등을 수사기관으로부터 사전에 고지 받지 못한 채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하고 진술조서에 서명했다. 이 자백을 토대로 1심과 애리조나대법원은 「미란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담당 경관 두 명은 피의자의 기본권을 충분치 보장하지 않은 채 수사를 진행했음을 시인, 결국 66년 미연방대법원이 『헌법에 보장된 묵비권을 침해하여 얻은 위법의 자백을 배척한다』며 유죄를 선고한 원심파기판결을 내렸다. <권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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