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조선에서 크게 빛나자”

중앙일보

입력

▶1953년 재건한 선경직물 공장.

이코노미스트“이름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선만주단이나 교토직물이나 관계없이 우리는 ‘조선에서 크게 빛난다’는 뜻의 선경이라고 하면 된다.” 1955년 선경직물은 상법상 독립 법인으로 홀로서기를 한다. 이때 회사 내부에선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선경(鮮京)’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느냐, 아니면 새 이름을 짓느냐의 문제에 부닥쳤다. 최종건 회장은 “이름이 좋아야 회사가 빛나는 것이 아니고 회사가 빛나면 이름이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다”라며 이 논쟁을 잠재웠다. 최 회장의 실사구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선경은 그 후 40년 동안 이 이름을 써오다가 1998년 SK로 바꾼다.


최종건은 집을 지척에 두고도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언제나 콘크리트 바닥에 간이 야전침대를 펴놓고 잠을 잤는데 그의 육중한 체구를 견디지 못해 간이침대가 망가지고 나서는 아예 거적을 깔고 누웠다.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아내인 노순애 여사에게는 고생길이 그만큼 크게 열리는 것이었다. 종업원들의 작업복을 빨아 대랴, 매일같이 찬거리를 날라 대랴 잠시도 쉴 겨를이 없었다.

사실 처음 벽돌을 쌓아올릴 때만 해도 수원에서 최종건은 ‘무모한 욕심쟁이’ ‘덮어놓고 일을 저지르는 사람’에 불과했다. 폐허더미 공장을 재건한다고 했으니 그런 말이 나왔을 법도 하다. 그런 잿더미 위에서 하루 1000마(碼)의 인조견이 쏟아지자 “하루 1만 마를 짜면 뭐 하느냐. 시장에서 팔려야지”하면서 또 평가절하하는 것 아닌가.

시장에서 선경직물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195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직물업계는 극심한 침체 국면을 맞는다. 전시 인플레이션 여파로 소비자 구매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수원 시내 대부분의 직물공장이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이런 시기에 사업을 벌였으니 최종건이 손가락질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고물 직기를 재조립해 생산한 제품임에도 선경이 내놓은 ‘닭표 안감’은 동대문시장에서 최고 값을 받는 인기 상품이 된 것이다.

당시 선경의 인조견은 ‘루스터(Rooster·수탉)’라는 상표로 팔렸는데, 이 제품은 ‘지누시(직물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한 번 빨아 다림질하는 것)’를 하지 않고도 바로 마름질을 할 수 있었던 터라 인기를 독차지했다. 최종건이 선경을 굴지의 기업으로 키울 수 있었던 것도 회사의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닭표 안감의 히트 덕분이다.

경쟁력은 ‘섬세함을 다루는 힘’이었다. 직물은 열처리 과정이 아주 중요하다. 대부분 열처리를 잘못해 빨래를 할 경우 옷감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제조업자 입장에서 보면 열처리라는 것이 적당히 넘겨도 되는 공정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아무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빨아보면 금세 차이가 난다. 속임수를 싫어하는 최종건이 그것을 그냥 넘길 리 없었다. 닭표 안감은 단숨에 ‘동대문시장의 강자’로 떠올랐고 1등 상품으로 가격 결정권을 쥐게 된 것은 물론이다.

빨아도 줄어들지 않는 안감

밤낮으로 생산을 독려하고 공장 재건에 매진한 덕분에 최종건은 55년 7월 제2공장을 완공한다. 이때 비로소 선경 임시 주주총회가 열렸다. 임시 주총에서 대표취체역 사장에 최종건, 상근 상무취체역에 김영환, 비상근 상무취체역에 김덕유를 선임했다. 자본금은 50만환, 주식 수는 50만 주였다. 그중에 49만9800주가 최종건 소유였다. 귀속재산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상법상 독립 법인으로 완벽한 홀로서기를 한 것이다.

이때 간부들 사이에 회사 이름에 대한 설전이 벌어졌다.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선경(鮮京)’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느냐, 아니면 새 이름을 짓느냐의 문제에 부닥친 것이다. 원래 선경은 선만(鮮滿)주단의 ‘선’ 자와 교토(京都)직물의 ‘경’ 자에서 따온 말이다. 새로 창업하고 나니 사명 변경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최종건은 ‘선경’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겠다고 하면서 논란을 이렇게 잠재웠다.

“이름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선만주단이나 교토직물이나 관계없이 우리는 조선에서 크게 빛난다는 뜻의 선경이라고 하면 된다. 선경은 ‘조선의 서울’이 되는 것 아니냐. 조선에서야 서울이 제일 아닌가. 이름이 좋아야 회사가 빛나는 것이 아니고 회사가 빛나면 이름이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다.”

그해 10월 1일은 회사 창립 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창립기념일 행사를 챙길 틈이 없었다. 대신 같은 날 서울 창경원(현 창경궁)에서 열리는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선경이 닭표 안감을 출품하기로 했던 것.

당시 박람회에 대한 직물업계의 관심은 대단했다. 최종건이 주최 측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전국 유명 메이커들이 전시회장을 다 차지해 버렸다. 창경원 직물 전시관 옆에 대형 수탉 모형을 세우고 직매장을 개설하는 등 최선을 다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번에는 그른 모양이다.”

최종건은 공장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왜요.”(이문재)

“전국의 유명하다는 직물회사가 다 모였는데 우리처럼 작은 회사가 어떻게 상을 받겠나.”

“뭐 공장 규모 보고 상을 주나요?”

경리를 맡아보던 이문재의 그 말에 최종건이 용기를 얻었다.

“그렇지 인조견에서 우리 닭표 안감을 당할 제품이 없지.”

선경은 산업박람회에서 보란 듯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동대문시장에서 닭표 안감은 없어서 못 파는 제품이 됐다. 현금을 가지고 공장으로 찾아오는 상인도 부지기수였다.

▶1958년 선보인 '봉황새 이불감'. 출시 이후 10년 동안 '필수 혼수품'으로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작은 사진은 선경직물의 처녀작인 '닭표 안감'.

이때 최종건은 제3공장 건설을 계획한다. 지금까지는 고물 직기를 재조립한 것이었고, 공장 역시 재건한 것이었다. 제3공장은 재건이 아닌 ‘신설’이다. 막대한 돈이 들 수밖에 없다. 닭표 안감이 아무리 히트한다고 해도 그럴 여력까지는 없었다. 주판알을 튕기던 김영환 상무가 “지금으로선 어렵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지금은 직물이 과잉 생산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불황을 대비해 여유자금을 비축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김영환)

“줄이다니요? 내 생각엔 그것도 작아요. 자금만 있다면 규모를 더 키우고 싶습니다. 불황에는 불황에 대처할 방법을 따로 강구하면 됩니다. 남보다 먼저 부가가치가 높은 새 제품을 개발해 스스로 수요를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곧바로 최종건은 산업은행에서 관장하던 기업 육성자금을 신청했다. 그 무렵 상공부에서는 원사 수입에 대한 외환 배정을 하고 있었다. 최종건은 어떻게 해서든 그것도 받아내기로 했다. 그가 믿는 것은 닭표 안감뿐이었다. ‘산업박람회 최우수상 수상작’이라는 것만 믿고 그는 상공부 외환 배정과 산업은행 기업 육성자금을 동시에 신청했다.

수원공장 찾아온 상공부장관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온 것은 최종건이 기름투성이가 돼서 고장 난 직기와 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아무 기별도 없이 김일환 상공부 장관이 선경직물 공장을 방문한 것이다. 기계 수리에 여념이 없던 최종건에게 이문재가 급히 달려가 “손님이 왔다”고 보고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최종건)

“상공부에서 왔대요. 높은 양반 같던데요.”

“누구라대? 국장쯤 되나.”

공장 앞에서 검은 세단을 세워놓고 기다리던 사람은 상공부 국장이 아닌 김일환 장관이었다. 김일환은 최종건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근처를 지나다 잠시 들렀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안 계신 모양이지요?”

“제가 사장입니다만. 최종건이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이거 미처 몰랐습니다. 나 상공부 장관 김일환입니다.”

그제야 김일환은 최종건에게 악수를 청했다. 순간 최종건은 당황했다. 손에 기름때가 잔뜩 묻어 있어 장관의 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얼떨결에 바지에 쓱쓱 손을 문지른 후 덥석 악수를 했다.

“죄송합니다. 기계를 만지던 손이라….”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시기에 사장 손이 이렇게 거칩니까.”

“(그제야 생끗 웃으며) 일을 많이 하다 보니…. 공장을 지을 때는 목수, 미장이, 목도꾼 노릇까지 했는 걸요.”

김일환은 방직업계를 시찰차 안양에 왔다가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선경이 생각나 수원으로 차를 돌린 것이었다. 공장은 아주 단정했다. 콘크리트 바닥은 실 한 오라기 없이 깔끔했고 중고 기계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름칠도 잘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종건이 “바닥에 기름 한 방울도 떨어져선 안 된다”면서 철저하게 관리한 것이었다.

▶1956년 지인들과 함께한 최종건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둘째).

“상공부에서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최종건은 원사 수입용 외환 배정과 기업 육성자금에 대해 건의했다. 보름이 지나고 상공부에서 3만 달러의 원사 수입용 외환을 선경에 배정했다는 소식이 왔다. 산업은행에서도 500만환의 기업 육성자금을 빌릴 수 있었다. 공정환율이 달러당 180환이었으니 모두 1000만환의 자금 여력이 생긴 것이다. 닭표 안감의 경쟁력 하나가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게 한 원동력이 된 셈이다.

그는 이 돈으로 채무 100여 만환과 관재청에 내야 할 선경 매수자금 잔액 91만환을 냈다. 트럭도 한 대 주문했다. 말은 못했지만 그동안 트럭이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태까지 선경의 유일한 수송수단은 마차였다. 마차로 수원역까지 옮긴 다음에 열차를 이용하다 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56년 3월의 일이었다.

한편으론 제3공장 설립을 밀어붙였다. 중고 직기 100대를 사들이고 대구에 있던 승리기계에 국산 직기 50대를 새로 주문했다. 56년 하반기부터 가동한 제3공장에서는 주로 인견을 만들었다. 인견은 보통 옷을 만드는 겉감으로 쓰인다.

그러나 여기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문직기에서 뽑아낸 인견 매출이 예상보다 부진했던 것. 당장 동대문으로 달려갔다. 동대문시장이야말로 ‘살아있는 직물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도안에 있었다. 안감은 빨래를 할 때 줄어들지 않고 착용감이 좋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겉감은 달랐다. 씨실과 날실이 균일해 섬세함이 돋보여야 한다. 특히 도안이 중요했다. 문직기의 성능이 비슷한 이상 디자인이 좋은 제품이 잘 팔릴 수밖에 없다. 최종건은 동대문에서 가장 큰 도매상을 찾았다. 거기에서 장안에서 도안이 가장 좋다는 태아산업공사를 소개받았다.

봉황새 이불감 10년간 1등

당시 태아산업은 서울 미아리에 공장이 있었고 조용광이라는 젊은이가 도안을 맡고 있었다. 알아보니 조용광은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다니고 있던, 요즘 말로 하자면 오너 경영인이 애지중지하는 ‘S급 인재’였다. 최종건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조용광이 ‘수원에 있는 작은 직물회사’에 갈 이유가 만무했다.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조용광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 대신 그의 동생인 조용민을 소개받았다.

이렇게 해서 처음엔 조용민이 선경에 합류한다. 조용민은 홍익대 회화과 출신으로 형의 도움으로 도안을 익힌 신예였다. 그러나 회사의 사활이 걸린 도안 문제를 해결하기에 조용민은 너무 경험이 적었다. 재고가 계속 쌓여갔다. 재고 때문에 창고를 새로 지어야 할 지경이었다. ‘조용광을 데려와야겠다!’

어느 날 재고 가득한 공장을 바라보던 최종건이 운전사 이경진에게 큰 소리를 쳤다.

“서울 가자.”

“서울 어디로 가는데요?”

“돈암동.”

당시 조용광은 돈암동에 직물공장을 차려 독립적으로 경영하고 있던 때였다.

“아니 사장님 어쩐 일로?”(조용광)

“지금 바쁘신가요.”(최종건)

“별일 없습니다만.”

조용광을 데리고 다짜고짜 지프 안으로 들어간 최종건은 “이제 수원 가자!”고 외친다. 이경진도, 조용광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자 태연하게 앉아있던 최종건이 “내가 지금 미스터 조를 납치하는 거요. 어차피 선경에 입사할 것이니까 공장 구경 해두지요”라며 너스레를 떠는 것 아닌가.

그날로 조용광은 공장장에 취임했다. 공장장 월급으로 20만원을 줬다. 보통 부장급 월급이 5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파격적인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6개월 뒤 최종건과 조용광이 ‘첫 번째 합작품’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봉황새 이불감이다. 72인치 대폭 양단의 양끝에 10인치짜리 색동 끝단을 달아 92인치가 되도록 한 것이다.

“92인치라 그러면 여덟 자가 되네. 여덟 자 한 폭으로 이불을 만든다. 괜찮겠는데. 한번 해보자고.”(최종건)

이때부터 조용광은 도안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이불감에 무궁화를 그렸다. 용꿈을 꾸고는 용을 그리기도 했다. 원앙금침이라는 말에 원앙도 그려봤다. 그러나 흡족하지 않았다. 어느 날 최종건이 문득 말했다. “원앙이 안 되면 봉황은 어떨까? 새 중에는 봉황이 최고지. 나는 봉황 덮고 자면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

완성된 봉황새 이불감이 나온 것은 58년 3월이다. 출시하자마자 봉황 이불감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철야작업을 해 문직기를 돌렸지만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봉황 이불감은 당시 혼수목록 1호로 꼽히면서 이불감 분야에서는 10년 동안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선경은 수원의 직물회사가 아니라 메이저로 떠오른다. <계속>

취재·정리=송재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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