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남자는 가라 - 지진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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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10면

사진 신인섭 기자 

최양일 감독이 지진희를 택했다는 것은 의외였다. 귀화하지 않은 채 일본에서 활동하던 최 감독이 한국에서 처음 만든 영화 ‘수’. 둔탁한 둔기에 맞는 소리, 흘러넘치는 피로 점철되는 최 감독의 영화이기에 지진희의 반듯한 몸과 얼굴, 게다가 그의 정직한 말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드보일드 클래식’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수’에서 지진희는 여태껏 보여주지 못한 살기를 뿜어냈다. 자신 안의, 자기도 모르는 분노를 끌어올리며 지진희는 영화 속에서 동물처럼 움직인다. 뛰고 달리고, 맞고 때리고, 그러다 엎어지고 마침내는 기어가는 ‘킬러 수’라는 역할이다.

지진희는 인터뷰 시작부터 “‘수’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라며 눈을 반짝였다. 하긴 그가 출연한 영화는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 것이 많았다. 조승우와 함께 출연한 ‘H’는 한국 최초의 남녀 버디 형사물이며, 진가신 감독에게 발탁돼 출연했던 ‘퍼햅스 러브’는 동아시아 최초의 초대형 뮤지컬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문소리와 호흡을 맞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어떤가. 지성이라는 얄팍한 외피를 쓴 교수들을 신랄하게 짓뭉개는 보기 드문 블랙 코미디였다.

“TV에서 봐왔던 모습만 보여주면 관객들이 본전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순전히 관객이 지겨울까 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출연작을 택한다는 지진희. 역시 ‘배려’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배려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모양이었다. 특공대 출신이라는 군복무 경력, 촬영 2개월 전부터 하루 5시간의 강도 높은 훈련을 거쳤어도 육체적ㆍ정신적으로 힘든 때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제가 81mm 박격포를 맡던 포병이었습니다. 군장 메고 나서도 박격포를 들고 다녀야 했죠. 구보하다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체력의 극한까지 가고, 그 한계를 뛰어넘으니 몸이 가뿐해지더라고 했다. “나중에는 산 몇 개를 뛰어다니게 됐다”는 그. 큰 키는 아니어도 다부진 몸이 지진희의 군대 이야기가 헛말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도 쇠몽둥이(부상을 막기 위해 만든 더미지만)를 들고 덤벼드는 10여 명의 사람을 상대로 단도 하나 들고 펼치는 막싸움 신, 또 다른 킬러 점박이(오만석 분)가 쇠줄로 목을 죄는 장면에서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합을 맞춘 격투였지만, 와이어 액션 하나 없는 배우의 실제 몸동작에 기댄 날것의 액션이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는 “액션 신에 대한 공포는 크지 않았어요. 체력 하나는 자신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내 안에 자고 있던 분노를 끄집어내 영화를 찍고 나니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우울증에 걸린 배우들이 이해가 가요.” 체력의 한계보다는 촬영 후 심리적 공황이 더 괴롭다는 이야기다. 그는 사이코 역할처럼 격한 감정의 인물을 연기하고 나면 몇 개월간 심리치료를 해주는 할리우드 시스템이 부럽다는 말도 했다.

“사는 게 언제나 만만치 않다는 것은 알죠. 그렇지만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 힘든 일도 누군가는 나보다 앞서 했다. 내가 못할 이유는 없다’고요.” 이와 함께 그는 ‘지금 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라는 자기 주문도 왼다고 했다. 오죽하면 최양일 감독이 “촬영 현장 상황이 안 좋아지는 순간에도 지진희는 항상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며 “그 덕분에 내가 오히려 힘을 얻었다”고 했다.

28세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했던 지진희. 공예학과를 나와 사진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연기는 관심도 없었다. “배우가 된 데는 IMF(외환위기) 덕이 크다”는 그는 한 매니저의 권유로 연기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들어선 스타의 길. 연기ㆍ발성이 형편없다는 비난에, 금세 인기가 사그라질 것이라는 빈축까지 중심 잡기도 힘들었을 터이다. 그런데 어떻게 전진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연기 못했죠. 노력과 시간이 조금은 해결해주더군요. 아직도 잘한다는 말은 못하겠네요. 그러나 갈 길이 머니 두고 보세요. 마흔다섯에 정점을 찍을 테니. 전 아직 젊습니다.”

서른 여섯, 파릇파릇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그는 굳이 자신이 “젊다”고 강조했다. 역시 그다운 해법이다. 지진희라면 가는 세월을 더디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하면 세상일의 절반 이상은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 그리고 스스로 운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은 힘이 셀 테니까.

LIFE STORY

1971년생 지진희는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다 99년 뮤직비디오 ‘조성빈-3류 영화처럼’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이후 SBS 드라마 ‘줄리엣의 남자’로 인지도를 높이다 MBC 드라마 ‘대장금’의 민정호 역을 맡아 연기ㆍ인기 면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아시아 지역에 수출된 ‘대장금’ 때문에 한류 스타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로는 ‘여섯 개의 시선’ ‘H’ 등 실험적 영화에 출연했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오래된 정원’ 등에서 주연을 맡다 이번 최양일 감독의 ‘수’에서는 과격한 액션을 선보이는 킬러 역으로 변신했다.  

FILMOGRAPHY

H 2002
역할장르 미스터리ㆍ스릴러
감독 이종혁 주연 염정아ㆍ지진희ㆍ조승우
여인들이 신체 일부를 절단당하는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자수한 범인 신현(조승우 분)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신현을 모방한 사건이 이어지고, 형사 미연(염정아 분)과 강이 투입된다. 한국 최초의 남녀 버디 형사물이자 심리 스릴러.

퍼햅스 러브 2005
역할 몬티 장르 뮤지컬ㆍ멜로
감독 진가신 주연 금성무ㆍ장학우
‘첨밀밀’의 감독 진가신이 만든 뮤지컬 영화로 주목받은 작품. 중국ㆍ홍콩ㆍ한국의 배우들을 섭외한 스타 캐스팅, 브로드웨이 무대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무대와 웅장한 노래가 화제였으며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로 출품되기도 했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2006
역할 석규 장르 코미디
감독 이하 주연 문소리ㆍ지진희
심천대학 교수 은숙(문소리 분)은 주변 남자들과 묘한 관계를 유지하는 인물. 그런데 심천대 만화과 강사로 인기 만화가 석규가 부임하면서 남자들을 대하는 은숙의 태도가 바뀐다. 성적인 코드를 다루지만 지식인에 대한 냉소로 가득 찬 작품.

오래된 정원 2007
역할 현우 장르 드라마ㆍ멜로
감독 임상수 주연 염정아ㆍ지진희
황석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군부 독재에 반대하다 17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현우에게는 잊지 못할 사람이 있다. 자신의 도피 생활을 도우며 갈뫼에서 함께 지냈던 윤희(염정아 분). 시대 때문에 아픔을 겪는 남녀의 사랑이 애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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