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감상적 소재』판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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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한국영화는 어쩐지 허술하게 보이고 허약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느낌은 비단 구성이 치밀치 못하다든가 주제가 선명치 못한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겨울여자』나 『겨울나그네』까지 갈 것도 없이 근작을 일별해도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 『하얀 비요일』 『달은 해가 꾸는 꿈』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마치 여고생의 일기장에나 숨어있을 말들이다.
좋게 보면 영화를 서정적인 분위기로 감싸주는 효과가 있으나 실제로는 감상 차원에서 맴도는 영화의 내용을 알려주는 증거일 뿐이다.
비약이 허용된다면 가령 『JFK』는 『하얗게 부서진 대낮의 양심』쯤으로 될 거고 『퐁네프의 연인들』은 『퐁네프다리위로 겨울새는 날고』로 제목이 붙여지는 식이다.
감성적인 영화에는 감성적인 제목을 다는 것이 옳다. 문제는 많은 한국영화가 감상수준에서 소재를 찾아 작품을 찍다보니 멜러 아닌 영화까지도 감상적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이다.
『남부군』도원작인 수기소설이 없었더라면 아마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로 발표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왜 한국영화는 『남부군』 『장군의 아들』처럼 힘이 밴 딱딱 부러지는 제목이 드문가. 그것은 한마디로 한국영화가 남성취향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60년대 이른바 「고무신관객」에 호소한 「기른 정, 낳은 정」식의 최루물에서부터 70년대 이후 사연 많은 호스티스, 방황하는 여대생 따위의 여자이야기가 한국영화의 주류를 형성했고 지금도 그런 경향은 계속되고있다.
덕분에 남성스타 중심의 스타덤이 형성되기는커녕 그들은 스크린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할리우드의 성장사를 살펴봐도 그렇듯 남자스타가 여자배우보다 생명력이 더 길고 관객 확보력도 더 강한 법인데 이런 남자스타덤이 없으니 영화의 힘이 떨어지고 허무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다.
또 허약체질을 앞장서 개선할 의무를 지닌 많은 제작자·감독·시나리오작가들도 결코 확실치도 않은 대중적 인기에 솔려 멜러 소재니 감각적 구도니 아름다운 영상 등에 매달려 근본적인 구조변혁을 유기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
설사 아직도 여자관객이 관객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하더라도 누군가 반드시 영화내용을 남성적 터치로 바꿔나가야 한국영화가 생명력을 되찾고 꿈같이만 보이는 해외시장개척도 훨씬 쉬워질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체제상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남자가 있고 그 뒤에 여자가 숨어있다. 영화계는 이제 「순애보」니 「비련」이니 따위는 일단 제쳐놓고 이 땅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과 인물들에 정변으로 달려들어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는 용기를 발휘할 때가 됐다.
이런 내용의 영화가 펼쳐질 때 한국영화도 현재로서는 불모와 다름없는 액선·모험·시대극 등의 장르개발이 힘차게 진행될 것이다.
상업적으로만 볼 때도 영동의 칼잡이들도 훌륭한 액션 극의 소재가 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한국의 정사·야사에서 살아 숨쉬는 무수한 영웅들의 세계가 스크린 위에 맥박칠 때 관객들은 진지하게 또 재미있게 영하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만나게 될 것이다.
주부대상의 TV『드라마게임』과 하등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 영화를 관객들이 찾을 리가 있겠는가. <이헌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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