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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에세이] '영웅 신화'도 검증하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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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유감입니다. 누군가 책임을 질 사람이 있을 겁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 국방부가 자랑스럽게 내세워 온 '영웅 신화'가 의회의 집요한 검증으로 새빨간 거짓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24일 미 하원 감독 및 정부개혁위원회(위원장 헨리 왁스먼.민주)는 우리에게도 낯익은 두 미군 전쟁 영웅의 진실을 파헤치는 청문회를 열었다.

먼저 2004년 4월 미국 프로풋볼(NFL) 선수 출신으로 360만 달러의 연봉을 마다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다 전사했다는 팻 틸먼.

그와 함께 전장에 투입됐던 동생 케빈이 증언대에 올랐다. 그는 "군 당국은 형이 다른 부대를 구출하려고 수색대 팀을 이끌다 적탄을 맞았다고 발표했지만 실은 동료의 오인사격으로 숨진 것"이라며 "국방부는 이를 알면서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 학대 파문을 덮기 위해 형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등 사건을 조직적으로 조작했다"고 폭로했다. 틸먼이 숨질 때 현장에 있었던 브라이언 오닐 상병도 "대대장 제프 베일리 중령이 '진상을 절대 말하지 마라. 발설하면 곤란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제시카 일병 구하기'스토리의 주인공 제시카 린치(24.여) 일병이 증언대에 올랐다. 이라크 전쟁 사흘 만인 2003년 3월 22일 나시리야에 투입된 린치는 전우들이 몰살된 가운데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잡혀 고문을 당하던 중 구출됐다고 발표됐다. 린치는 일약 영웅이 됐고, 미국은 그녀의 스토리를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는 소재로 곧잘 써먹었다.

그러나 린치는 청문회에서 "난 이라크 군인들과 싸운 적이 없고, 구출 과정에서 이라크 의료진의 도움을 받았다"며 "왜 군 당국은 나를 람보로 조작해 거짓 신화를 만들려 했는지 모르겠다"고 폭로했다. 그녀는 "전장에서 일어나는 진실은 하찮아 보이지만 과대포장보다 그런 작은 진실들이 정말 영웅적인 것"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미국은 '영웅'을 먹고사는 나라다. 역사가 짧아 위인이 부족한 가운데 인종.문화적 배경이 다른 국민을 하나로 묶어 에너지를 창출하는 데 적격이기 때문이다. 영웅의 필요성은 전시(戰時)에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거기엔 엄격한 제한이 있다. 바로 '진실'이다. 미 의회는 부시 행정부가 영웅 만들기에 급급하다 진실을 팽개친 사실을 다소 늦긴 했지만 끈질긴 검증을 통해 밝혀냈다. 입으론 검증을 외치면서 진짜 검증에는 게으른 한국의 국회가 배울 점이다.

강찬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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