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벗어난 느낌”/영등포경찰서장 LA목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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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화염… 총성… 비명… 흑인만 보면 “오싹”/폐허로 변한 터전보며 한인들 통곡
『밤이 깊어가면서 LA는 지옥으로 변해 갔습니다. 차창을 사이에 뒀지만 칠흑같은 암흑속에서 분노하는 흑인들의 약탈,방화로 불타는 한인 상점과 차량의 화염,심장을 멎게하는 총소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1일 오후 5시25분 대한항공017편으로 격랑의 현장 LA에서 귀국한 영등포경찰서장 이재열 총경(58)은 『대학가 과격시위와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고 직접 지켜본 LA흑인 폭동 현장을 전했다. 이 서장이 LA에 도착한 날은 현지시간으로 폭동이 일어나기 이틀전인 27일 오전 11시쯤. LA한인타운을 관할하는 LA시 월셔가의 월셔경찰서와 영등포경찰서간의 자매결연을 위해서였다.
사태당일인 29일 오후 5시10분쯤 LA부근 산마리노에 있는 남가주경찰학교를 시찰하던중 흑인폭동 긴급사태를 현지 경찰간부로부터 전해듣고 헬기로 황급히 월셔가로 돌아갔다.
사태초반만해도 그다지 큰 방화나 약탈은 없었지만 밤이 되면서 순식간에 긴장과 두려움이 LA를 뒤덮었다.
이서장은 저녁식사 모임에서 교포들로부터 『흑인들이 폭도화되고 있다』『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의 술약속도 취소한채 숙소인 코리아나호텔로 돌아갔다.
이서장은 경찰관으로서의 호기심도 있고 TV로만 사태를 파악하기는 힘들어 사업을 하는 친구와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이때가 오후 9시30분.
모든 상점이 철시한 음산한 거리로 나섰을때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이 통행을 막는 바리케이드였다. 거리는 온통 흑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탕 탕』 총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차를 몰아 한인들이 몰려있는 올림픽가쪽으로 가자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곳곳에서 방화로 상점들이 타고 있었고 흑인들이 닥치는대로 철문을 부수고 물건들을 약탈했다. 몽둥이를 들고 몰려 다니는 흑인들과 남미인들을 만날때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다행히 공격은 받지 않았다. 2시간30분여동안 시내를 돌고 숙소로 돌아와서 생각하니 『어떻게 우리교포들이 모은 재산들인데…』하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치밀었다.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간간이 들리는 총소리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30일 오전 공항으로 가는 길은 시내 곳곳에 검게 타버린 집과 거리에 흩어져 있는 폐허가 지난밤의 광란을 보여주었고 태풍사이의 고요와 같은 긴장이 느껴졌다.
이 서장은 『귀국비행기에 함께 탑승한 3백11명 승객들의 눈빛에서 지옥을 빠져나온 초조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정선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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