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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 선별등재제도 연기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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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로 국내 제약업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의약품 지적재산권은 더욱 강화되고 보호막 역할을 하던 비관세장벽은 대거 사라졌다. 우리 정부는 건강보험에 등재하는 의약품 선별등재제도를 잘 지켜냈다고 자평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밝혔듯이 선별등재제도는 협상의제가 아닌 국내 정책이었고, 제약산업 경쟁력 강화와는 거리가 먼 제도다. 정부 정책의지에 맞춰 값싸고 질 좋은 의약품을 계속 만들기도 어렵고, 허가를 받아도 보험 등재가 불확실한 환경에서 품질 향상과 신약 개발을 위해 투자 의욕을 불태울 기업은 없다.

FTA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협력을 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을 보면 이 제도의 본질이 잘 나타난다. EU 내에선 국가 간 무역에 따른 관세가 없고, 한 국가에서 승인한 의약품은 다른 국가에서 임상시험을 실시해 품목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다. 선별등재제도를 시행 중인 스웨덴.프랑스.이탈리아 등은 주로 수입 의약품에 의존해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선별등재제도가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미국.독일.영국 등 제약 선진국의 의약품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수비형 빗장전략임을 알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선별등재제도로 받는 국내 제약기업의 충격이 다국적 제약기업보다 몇십 배 크다는 점이다. 다국적 제약기업은 의약품의 경제성 평가 경험이 많고 관련 자료와 전문인력도 풍부하다. 반면 내수시장에 의존해온 국내 기업은 경제성 평가 인프라가 전혀 구축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의약품의 비용.효과성을 입증해야 할 처지다. 이런 제도를 도입해 놓고 한.미 FTA를 제약기업 체질개선 및 경쟁력 증진 기회로 삼으라는 것은 선수의 손발을 묶어놓고 링에 오르라는 주문과 같다.

앞으로 유럽.중국.일본.인도와 FTA 협상이 속속 추진될 것이다. 이런 환경변화 속에서 제약산업이 발전하려면 신약개발 역량을 키워야 한다. 제약업계는 새로운 성장전략을 찾아내고, 정부는 제약업계에 용기와 신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선별등재제도 실시를 유예해야 한다. 제약기업들이 자유롭게 다국적 제약기업과 경쟁할 수 있게 된다면 분명 다윗과 같은 제약기업이 출현할 것이다.

문경태 한국제약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