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모씨의 경우(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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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보,현옥 아버지. 40여년 세월 마음속으로만 불러보며 생사를 알길 없어 애태워 오던 당신이 남녘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리별의 그날로부터 어언 세월이 흘러 어제날의 23살 꽃나이 청춘이 64살의 로파가 된 한 녀인이 남편을 소리쳐 부르며 흘린 눈물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고뇌가 깃들여 있는지 당신은 리해하실 겁니다….』
남녘에 있는 남편. 도대체 그가 어떤 인물이기에 북녘에서 보낸 이런 기막힌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이름 이인모. 나이 75세. 현주소 경남 김해군 진영읍 신용리. 직업 없음. 그의 신상명세서는 이렇게 단 넉줄로 끝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역정은 그야말로 한권의 소설로 엮을 만큼 기구하다.
함남 흥남이 고향인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던 50년7월 인민군 문화부소속 기자로 종군한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잃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찌산이 된다. 그곳에서 그는 「남로당신문」이라는 빨치산 선전신문을 내다 52년 총상을 입고 국군에 붙잡힌다.
그는 7년형을 살고 59년 출소,연탄공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5·16후 다시 수감된다. 그리고 「전향」을 거부한채 27년동안 옥살이하고 88년 사회안전법 폐지로 풀려나온다. 그는 현재 독지가인 김상원씨 집에 기거하고 있다.
그는 작년에 『말』지에 수기를 썼다. 그게 빌미가 되어 북의 가족소식을 듣는다. 한 재독동포의 도움으로 편지도 받는다. 물론 북쪽의 신문에 실린 것을 팩시로 보낸 것이다.
이 이인모씨를 부산지역의 일부 종교인·시민단체 등이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자는 탄원서를 내 화제가 되고 있다. 인도적 차원에서 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6·25때 납북된 수많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한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이씨는 자신의 「선택」이었고,납북은 「강제」가 아니었던가.<손기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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