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비용 신고/수십억 쓰고도 대개 “1억선”(정치와 돈:9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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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관위 “실사” 목소리 높이자 줄여 짜맞추기 법석/주간연재
윤관 중앙선관위원장이 지난 10일 『당선자 몇명이 희생돼도 좋다는 각오로 선거비용 제한액을 초과사용한 후보자에 대해 철저히 조사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대부분의 후보자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후보들은 그동안 『선관위야 선거때면 으레 물대포를 쏴대는 것 아니냐』며 선관위의 엄포를 귓등으로 흘려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관위가 다른 때와는 달리 선거가 끝난 후에도 선거비용을 실사하겠다고 나서자 설마하면서도 『시범케이스에 걸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뒤늦게 선거운동관계자들과 말을 맞추느라 분주하다는 후문이다. 선거종료후 15일이내 관할선관위에 제출키로 돼있는 후보자들의 선거비용 지출보고서에서 어느 후보도 제한액을 넘겼다고 「자수」한 사람은 없다.
선거당시 민자당내에서는 20억원을 쓰면 떨어지고 30억원을 쓰면 당선된다는 「20낙30당」설이 공공연히 떠돌았고 영남지역 모후보는 1백억원에 육박하는 돈을 쓰고도 고배를 마셨다는 얘기까지 나온 마당에 후보자들의 결백주장을 믿을 사람도 없다.
이러한 후보자의 결백주장과 유권자의 불신사이 편차를 선관위가 파고들어 까뒤집어 놓겠다는 것이다.
후보자들의 지출보고서 내용을 훑어보면 그 허구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대구지역에서 호화판 창당대회로 물의를 빚은 민자당의 김복동 당선자(동갑)는 제한액 1억1천여만원보다 1천5백만원을 덜 쓴 것으로 보고했고 문희갑후보(서갑)도 제한액 1억7백만원의 절반인 5천3백만원을 덜 썼다고 신고하고 있다. 같은 서갑지구의 정호용 당선자(무)도 제한액보다 3천만원이 미달한 것으로 보고했다.
민자·민주의 자존심대결을 벌인 부산 동지구의 경우 민자당 허삼수 당선자는 규정액 1억3천여만원보다 5천7백여만원을 덜 사용했다는 것인데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는 4천3백여만원을 덜 쓴 것으로 보고했다.
이와 함께 후보자들은 한결같이 공식선거비용중 가장 비중이 높은 현수막 및 소형인쇄물 제작비 항목에서 규정액보다 적게 쓰고 있다.
선거당시 후보자들은 운동원일당이 과중한 부담에 시달려야 했으며 일부 당선자들은 선거가 끝난뒤 수고비명목으로 봉투를 돌리다 말썽을 빚기도 했다.
지난해 지방의회선거를 거치면서 운동원일당이 5만원,많게는 10만원까지 올랐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인데 하루아침에 선관위 규정처럼 5천원씩으로 대폭 삭감될리가 없다.
선관위가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항목이 바로 운동원비용과 홍보물 인쇄비 등이다. 개별면담을 통해 사례를 수집,고발하겠다는 것이다.
20억원을 쓰고도 낙선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경북지역의 한 무소속후보는 제한액보다 4천여만원을 덜쓴 것으로 보고했고 중앙당으로부터 10억원을 지원받은 것으로 소문난 국민당의 K당선자는 제한액 1억4천만원중 9천만원만 지출한 것으로 보고했다.
수원시 장안구의 경우 제한액 1억3천여만원중 민자당의 이병희 후보는 4천8백만원을,민주당 박만원 후보는 4천1백만원을,국민당 이호정 후보는 7천3백만원을 쓴 것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야 모두 규정액의 3분의 1내지 절반정도만 사용했다니 피장파장이다. 정치1번지라는 서울 종로에서 민자당 이종찬 후보는 2천만원,민주당 김경재 후보는 9천1백만원을,국민당 이내흔 후보는 7천8백만원을 규정액에서 남겼다는 주장이다.
후보자들의 비양심적 태도도 문제지만 현행선거법에도 함정이 있다.
선거법상 선관위에 신고하게 돼있는 선거비용은 후보자등록때부터 당선결정일까지 소요되는 경비로 ▲선거사무소·연락소의 임차료 및 유지비 ▲선거사무장·연락소장·운동원의 실비보상 ▲자동차·선박의 임차료 및 유지비 ▲현수막·소형인쇄물의 작성 및 게시경비 ▲후보자 자신의 경비 ▲정당연설회 소요경비 등으로 국한돼 있다.
따라서 후보등록 이전에 소요된 경비는 선거법상 선거비용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후보자의 연락사무소와는 별도로 설치할 수 있는 정당의 읍·면·동 연락소 유지비용도 선거비용에서는 빠져있다.
어림잡아 여당의 경우 지구당별 읍·면·동 연락소는 15개 정도이며 여기에 연락소장과 통책(연락소마다 30명선)·반책(동마다 3∼5명선)을 포함할 경우 2천∼3천명의 사실상 운동원을 두고 있는 셈이다. 한 여당당선자는 이들에게 2,3월중 세차례의 조직유지비를 살포하는데만 10억원이상이 소요됐다고 귀띔했다.
또 당원단합대회 명목으로 사실상의 주민대상 사랑방좌담회를 개최하면서 조직활동비로 나눠주는 돈봉투에 대해서는 선관위의 접근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임좌순 중앙선관위 선거국장은 『이러한 탈법선거를 막기 위해 현재 무제한 개최할 수 있는 당원단합대회의 횟수를 제한하고 반드시 지구당위원장이 참석토록해 금품·향응제공이 위원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두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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