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예쁘고 개성 있게" 열정 19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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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금은세공 김종목 씨
『아름다움과 개성을 끝없이 추구하는 작업이 바로 금은 세공이지요. 그러나 제가하는 작업을 예술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보석의 특징을 살리고 고객의 마음에 들게 작품 만드는 게 제가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예술가임을 거부하고 장인임을 강조하는 김종목 씨(38·럭키보석디자인대표)는 우리 나라에 3명밖에 안 되는 금은 세공부문 명장중 한사람이다.
어엿한 중소기업사장이지만 공방에서 하루도 빠짐 없이 금과 은을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드리는가 하면 보석을 갈고 닦아 고객이 주문한 장신구를 만들어내고 있는 김씨의 생활철학은 철저한 장인정신이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품을 고객에게 건네주지 않고, 고객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마음에 들 때까지 작품을 만지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자신이 명장이 된 비결에 대해『남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결과일 뿐』이라고 겸손해 하는 김씨는 지난 74년 19세의 나이로 고향인 강원도 양양에서 상경, 금은 세공업에 뛰어들었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만드는 것이 취미였던 그에게 형(종원씨)이 가져온 남대문부근 소재 한국보석학원의 학생모집 팸플릿 한 장이 그가 금은세공 장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였다.
당시 꽤 큰돈이었던 월3만원의 학원 비는 형의 도움으로 조달하고 6개월만에 졸업한 김씨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명동에 있던「신아사」라는 공방이었다.
판잣집에 물도 안나오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한달 2천 원의 봉급을 받아가며 선배들이 만든 반지· 목걸이의 광택을 내는 일부터 시작한 견습생생활은 그야말로 밑바닥 생활이었다.
하루 일이 다 끝나고도 밤에 따로 남아 2∼3시간씩 기술을 연마한 노력이 보람이 있어 3개월만에 자수정 반지 3개를 만드는 일감이 떨어졌고 단번에 합격, 납품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 뒤부터는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 드디어 79년 선배들을 물리치고 인천에서 열린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참가,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어 81년 미 아틀랜타 시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참석, 동메달을 획득했고 90년 부산에서 열린 기능경기대회에서 대망의 금메달을 획득해 명장에 선발됐다.
아틀랜타 국제기능 올림픽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5개월 후인 81년11월 자신을 키위 주었던 신아사 권병우 사장의 권유와 배려로 독립, 현 위치인 서울 충무로 삼영 빌딩에 「럭키보석디자인」이라는 자신의 공방을 차렸다.
세공에 뛰어든 지 7년만에 초고속으로 자신의 자그마한 꿈을 실현한 것이다.
그는 그 동안 상금· 월급을 모은 1백50만 원을 투자해 마련한 15평의 공방에서 숙식하며 기업경영 ( ? ) 을 했지만 2년간은 적자 투성이여서 악전고투했다고 회상했다. 82년 결혼했을 당시 신부에게 금반지 하나만들어 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제품 하나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인 결과 점차 주위에 이름이 나기 시작했고 지금은 3천명의 단골고객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자신의 밑에 15명의 후배를 양성하고 있는 김씨는 『보다 아름답게 보다 개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일하라고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며 『내가 맡은 물건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정신이 중요하다』 고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이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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