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민주의식은 높았다/이상우(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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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합리적 판단이 전제될 때만 제대로 작동하는 정치다.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 국민들은 높은 민주의식을 보여주었다. 말로만 민주주의를 팔아오던 정치인들보다 여러모로 앞서는 생각을 하고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념적 선명성을 드러낸 정당도 없고,부각된 정책적 쟁점도 없었으며 나라의 앞길을 비춰주는 비전을 제시해준 후보자도 없는 정당부재,정치인부재,정책부재,지도자부재의 정치적 황무지 속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도 우리 국민들은 묵묵히 투표장에 나갔다. 71.9%의 투표율은 민주주의를 살려보려는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무능한 집권여당 심판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무능하고 무책임한 집권여당의 안이한 독주의 지속을 막았다. 국익보다 당파이익에 더 집착했던 제1야당의 약진도 견제했다. 조직과 돈만 있으면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던 신흥정당의 바람도 재웠다.
국민들은 성숙된 이성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호남지역에서 민주당 후보가 아닌 후보가 그렇게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은 호남 유권자들의 정치적 성숙성을 보여준 것이다. 지역감정을 부채질 하는 정치지도자들의 부치김을 이겨내고 민주주의를 망치는 맹목적 지역 편파주의를 이겨보려는 호남유권자들의 이성적 결단의 표현이 그정도의 결과를 냈다고 본다.
정당별 의석수를 놓고 희비가 갈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의석수 보다도 표의 분포가 보여주는 국민의 뜻을 새기고 여기서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참패를 모면하고 그나마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데 대해 민자당은 안도할지 모르나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번에 받은 38.5%의 표가 모두 「지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표중의 상당수는 「지지」가 아니라 「인용」이었다. 달리 찍어줄 정당과 후보가 마땅하지 않아 할 수 없이 찍어준 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용을 지지로 착각하면 지난번처럼 또 실수한다. 겸허하게 국민의 뜻을 새기고 자성의 계기로 삼아 「일 하는 여당」「책임지는 여당」으로의 변신를 시도해야 한다.
민주당이 29.2%의 지지를 얻고도 기대 밖의 의석수를 얻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도 반성해야할 일이 많음을 알 것이다.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던 민자당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민주당이 그 대안임을 보여주었던가를 스스로 따져 보아야 한다. 시대는 이미 21세기로 흘러들어가는데 아직도 30년전과 같은 낡은 전술적 기교로 선거만을 이겨보려 했는데 국민들이 새로운 집권당으로 받아 주겠는가.
○국민당도 자만은 곤란
국민당의 원내 교섭단체 구성 의석확보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큰 주목거리가 되고있다. 출범과 동시에 중요정당의 위치를 확보한데 대해 국민당은 자신감을 얻은 모양이나 너무 자만해서는 안된다. 정당이란 이념과 뜻을 같이하는 정치인들의 조직체다. 누구를 대표하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뚜렷이 밝히지 못하는 조직체가 하루 아침에 정당으로 둔갑할 수는 없다.
이번에 받은 17.4%의 지지표 대부분은 엄격히 따진다면 집권여당에 대한 반발의 표시지 국민당에 대한 지지는 아니라고 본다. 군사정권이 지겹고 TK만 찾는 민자당을 못마땅 하게 여기는 중도보수의 유권자들이 민자당에 교훈을 주기 위해 던진 표라 생각해야 한다. 국민당이 진정으로 정당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제부터 새로 정당의 요건을 갖춰 재출발 해야 한다.
민중당이 국회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늘 재야에서 투쟁해오던 진보세력들이 민주주의의 틀속에서 당당히 정치투쟁을 벌이겠다는 결심으로 엮은 민중당의 선거참가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었다.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탓이라 하더라도 원내의석 확보를 못한 것은 섭섭하다. 그러나 30만명의 유권자가 이들의 출현을 긍정적으로 받아주었다는 사실은 중시할 필요가 있다. 당이 제대로 정비되면 다음 선거에서 상당한 세력으로 국회에 진출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선거는 끝났다. 선거로 들떴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지금부터 해나가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한단계 더 높이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우선 기존정당의 채질개선부터 해나가야 한다. 지금과 같은 무이념의 파당적 정당조직으로는 국민의 의사를 정치로 이어주는 교량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정당이 국민의 뜻을 대변하지 못하면 정치는 계속해 정치무대 밖에서 행해지게 된다. 뚜렷한 이념·정강·정책 노선을 내세울 수 있는 가다듬어진 정당들이 출현해야 국민들이 정당위주의 투표를 할 수 있는 정당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수 있다. 정당의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4년 뒤에도 똑같이 국민들은 당을 선택하지 못해 답답해 하며 선거를 치르게 된다.
○정당 체질개선 급하다
둘째로 각 정당은 당내 민주주의를 빨리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 자기당내에 기반을 가지지 못한 뿌리없는 정치인이 정가에 몰려다니는 동안에는 혼란·타락선거가 반복될 것이다. 당에서 후보를 엄선해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사람을 공천해야 우리도 질높은 국회를 만들 수 있다.
국민의 민주의식은 이제 성숙되었다. 이제 국민수준에 맞는 정당과 정치지도자를 길러내는 일이 남았다.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 정당정치를 재촉하는 채찍이었다고 받아들이자. 민주주의는 이제 가까운 곳에 와있다.<서강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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