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스타 영입에 목매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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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가 '무인시대' 후속으로 내년 7월부터 방송할 예정인 대하사극 '이순신'(가제)의 주인공역으로 연기자 이병헌을 섭외 중이라고 한다. 1991년 KBS 14기 탤런트로 데뷔했으니 만약 그가 이 역을 맡게 되면 금의환향인 셈이다. 그런데 현실의 문맥은 영 딴판이다. 그는 오히려 '의리'와 '희생'을 강요하는 '고향 인사'들에게 '제발 나를 내버려 두라'고 간청했다는 소식이다. 왜 그럴까. 본인에게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0부작이니 일 년 간은 영화 출연도 어렵게 되고 사극의 이미지가 덧입혀지면 CF계의 주문도 뜸할 우려가 있다고 소속사는 판단하는 듯하다.

수긍이 간다. 거부하는 그를 나무랄 이유가 전혀 없다. 원하는 일도 잘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원하지 않는 역을 맡는 게 무리일 것이다. 형편이 이쯤 되자 방송사 관계자는 '이젠 사장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한숨과 함께 '사장하기도 수월치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제작진이 스타 섭외에 집념을 갖고 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집념과 집착은 다르다. 집념은 용기와 슬기가 동행하지만 집착은 오기와 객기가 병행한다. 점찍은 스타가 출연을 '수락'하기만을 기다리다가 나중에 허겁지겁 촬영 일정에 쫓긴다면 잃는 게 얻는 것보다 더 크다. 그 시간에 작가를 독려하고 대본을 해석하고 촬영 장소를 돌아본다면 좀더 나은 작품이 나오지 않겠는가.

단지 '이순신'뿐이 아니다. SBS 대하사극 '토지'의 주인공 서희 역으로 탤런트 김현주의 이름이 오르내리는데 정작 당사자 측은 느긋한 자세다. 애가 타는 쪽은 제작진이지만 결국 스타에게 목매는 일로 손해보는 건 시청자다. 같은 방송사가 준비하는 '장길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차제에 공개 오디션을 제안한다. 대뜸 '도대체 누가 오겠는가'하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바로 지금 인기 있는 스타급들은 안 올지 모른다. 그러나 인기는 없지만 대신에 실력이 있는 '준비된' 자들은 그동안 갈았던 칼을 지니고 찾아올 것이다. 음침한 골방에서 몇 명이 앉아서 선발하지 말고 시청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오디션 현장을 중계한다면 그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그 자체로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홍보 효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른바 특별기획드라마를 만들 때마다 주요 배역의 오디션을 공개 프로그램으로, 그것도 깔끔하게 잘 포장해 만들어 보라. 시트콤, 아니 각종 오락프로그램 MC도 오디션을 해 선발하기를 권한다. 겹치기의 폐해도, 캐스팅을 둘러싼 일부의 잡음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방송사가 자꾸 위축된다고 탄식하는데 실상 스스로 그렇게 만드는 면이 없지 않다. 스타에게 너무 몸을 낮추지 마라. 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을 그렇게 긴 시간 설득하여 굳이 데려올 필요가 있는가. 스타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묵묵히 연기를 생업으로 삼고 사는 다른 연기자들에겐 상실감을 안겨준다.

신인 연기자를 공들여 뽑아놓고 '이젠 알아서 커라'고 말하는 일도 줄어야 한다. '방송은 교육기관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도 마라. 잘 기르고 정성껏 키우면 다 도움이 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보석만 탐내지 말고 묻혀 있는 원석을 찾아서 깎고 다듬고 기름을 쳐라. "키워 놓으면 배신하는데 뭐 하려고 키워?" 시냇물을 배신하고 강물로 간 것도 배신인가? 배신자가 늘면 속으로 흐뭇해하라. 그리고 넓은 바다에서 그를 웃으며 다시 만나라.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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